다시 세우는 삶

시절친구

by 제인


좁은 사무실.

여직원 네 명이 둘씩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다. 사장실 바로 옆 공간에 파티션으로 경계를 나눠 놓은 자리다. 오래 다녔던 경리과 여직원이 어느 날 월급을 올려달라고 했다가 사장과 한바탕 크게 다투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이후 회사는 한 사람이 하던 일을 세 명으로 나누어 새로 채용했다.


몇 주 전, 해외영업 업무로 전무님과 논쟁이 붙었고 의견 차이 끝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그때 사장이 나를 붙잡으며 사무실 자리를 옮겨 주었다. 누구를 위한 자리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장실 바로 옆 사무실. 나는 새로 들어온 경리과 여직원 세 명과 함께 그 공간에 앉게 되었다. 여자 네 명이 사장실 옆에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마치 사장을 둘러싸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에 얼굴마담처럼 앉혀 놓은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앞 건너편에 앉아 있는 두 여직원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우연히 그 둘의 책상을 보게 되었는데 상당히 어수선했다.

나는 정리정돈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책상이 어지러우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주변 사람이 지저분하거나 게으르면 그 자체로 피곤함을 느끼는, 조금 예민하고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다행히 내 옆자리에 앉은 직원은 나와 비슷한 사람이었다. 정리병이 있는 듯 매일 책상 위 도구들의 위치를 바꿔 가며 정리를 했다. 항상 책상이 깔끔했고 서류 하나도 흐트러지게 두지 않았다. 그 점이 나는 마음에 들었다.


그 친구는 타인의 기분을 잘 알아차리고 분위기에 영향을 많이 받는 사람이었다. 눈치가 빠르고 무척 부지런했다. 사장 눈에도 그 모습이 보였는지 세 명 중 그 친구만 유독 예뻐하는 것이 내 눈에도 보였다.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 보니 생활 습관, 행동, 말투, 일처리까지 모든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 친구에게 점점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 친구가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친구는 내 편 같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친구에게는 오래 사귄 남자친구가 하나 있었다. 성격 차이 때문인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다가 결국 헤어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 사람과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솔직히 그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여자친구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이야기, 삶이 괴로워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니 어딘가 일반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를 몇 번이나 설득해 보았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누군가 말린다고 멈춰지는 것은 아닌가 보다. 결국 그 둘은 결혼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또한 그들의 인연이었겠지 싶다. 시간이 지나 그들이 나름대로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한 가지를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의 인생에 배나라 감나라 하는 것은 어쩌면 꽤 주제넘은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이를 먹으면서

그걸 조금씩 알게 되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그 직장은 우리 모두 떠나게 되었고 나 역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각자 아이를 낳고 엄마로서의 삶을 살게 되면서 우리의 친분은 오히려 더 두터워졌다.


육아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서로의 어려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때로는 아무에게도 하지 못했던 속 깊은 이야기들을 나누기도 했다. 그 친구는 세상에 하나뿐인 동반자처럼 느껴질 만큼 소울메이트 같은 친구가 되어 있었다.


서로 아이가 어리다 보니 우리는 주말마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함께 캠핑을 가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 집에 놀러 와 1박 2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많은 것들을 서로 나누었고 함께 보낸 시간 속에서 참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다.


사회에서 만난 동료가 오랜 학교 친구보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서로 의지하는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꽤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관계가 나에게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시간을 함께 할수록 우리 가족은 그 친구 남편의 행동과 말을 점점 이해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 남편은 성인 ADHD가 있었다. 나쁜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감정 기복이 심해 보였고 어느 날은 완전히 이기적인 아이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상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느낌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도 어떤 날은 굉장히 똑똑하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고 자신의 단점조차 솔직하게 말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나는 애써 이해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조금씩 피로가 몰려오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친구와의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참기도 했고 그 남편의 행동을 눈감고 지나갈 때도 많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 남편이 그 만남 속에서 말을 거의 하지 않기 시작했다. 그 친구 역시 자신의 남편이 가진 부족한 부분을 잘 알고 있었기에 늘 우리에게 자세히 설명해 주곤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 관계 자체가 서서히 지쳐가고 있음을 느끼고 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내 아이에 대해서 그리고 나의 육아방식에 대해 훈수를 두는 그 부부의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그 자리에서 차갑게 닫혀 버렸다.

늘 나의 어려움과 고통을 이해해 준다고 믿었는데 그 순간 지금까지 참아 왔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는 결코 그 집 딸에 대해서 왈가왈부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자식 이야기는 정말 예민한 부분이라 서로 조심해야 하는 영역이라고 나는 늘 생각해 왔다. 그런데 마치 자신들이 나보다 위에 서 있는 것처럼 훈수를 두는 모습에 나는 크게 실망을 했던 것 같다.


사람 사이의 관계라는 것이 꼭 큰 사건이 있어서 끝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나도 예전처럼 노력하지 않게 되고 상대도 더 이상 애쓰지 않게 되면서 그 관계는 그 자리에서 조용히 멈추게 된다.


우리도 그랬던 것 같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연스럽게 연락이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의 삶을 멀리서 짐작만 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친구를 꽤 좋아했었다. 그래서인지 그 관계가 끝났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저 우리 사이의 시간이 거기까지였다고 생각한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라는 것은 생각보다 길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내 삶에 깊게 들어왔다가 어느 순간 조용히 지나가기도 한다. 굳이 다툼이 있어서도 아니고 누가 잘못해서도 아니다. 그저 서로의 삶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멀어질 뿐이다.


그래도 나는 그 시간을 나쁘게 기억하지 않는다.

그 친구는 내 삶의 어느 시절을 함께 지나간 시절 친구였으니까.

살다 보면 그런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잠시 함께 걷다가 어느 순간 다른 길로 가는 사람들.

그게 어쩌면 사람 사는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그 친구는 내 삶의 어느 시절을 함께 지나간 시절 친구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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