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렇게 Jane이 되었다
중학교 2학년 가을학기. 서른다섯 살의 노총각 영어 선생님이 새로 부임해 오셨다. 키가 제법 크고 체격도 좋았으며 짙은 눈썹을 가진 선생님이었다. 군 장교 출신이라고 소개하셨는데 말투도 남자답고 박력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이라 낯설고 조금 무서워 보여 긴장한 채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교탁 앞,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나를 보고 선생님이 싱긋 웃어주셨다.
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잘생긴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날 내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콩닥콩닥, 돌만 굴러가도 까르르륵 웃던 사춘기 시절. 선생님 생각으로 가득했던 나의 그 시절을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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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항상 영어 테이프를 틀어주는 카세트 오디오와 까만 몽둥이를 손에 들고 교실에 들어오셨다. 한국 사람에게 배우는 영어는 발음이 좋지 않다며 항상 테이프를 반복해서 틀어주셨다. 외국인 발음으로 영어를 따라 하도록 여러 번 연습을 시키셨다. 늘 어렵고 재미없던 문법위주의 영어 수업이 그때부터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그렇게 영어가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작은 단발머리 소녀는 그 선생님을 바라보며 조용히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날 이후 영어가 무척 좋아져 버렸다.
지금 돌아보면 내가 영어를 사랑하게 된 시작은 모두 최철순 선생님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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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평생 갈 것 같던 사랑은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선생님이 장가를 가시면서 비극처럼 끝이 났다. 그날 나는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빨간 세숫대야 앞에서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걱정 어린 시선과 기가 막혀하시던 모습도 떠오르고.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습고도 귀여운 추억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굉장히 괴로웠었다.
하지만 그 선생님 덕분에 나는 지금까지도 영어를 정말 좋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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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이 된 어느 날, 영어를 좋아했지만 여전히 영어는 어려웠다. 영어를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던 나와 친구는 고민 끝에 용산에 있는 삼육 외국어학원을 다니기로 했다.
그곳에서는 초급 단계에서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한국인 선생님에게 배우는 방법과 외국인 선생님에게 배우는 방법. 나는 고민 끝에 처음부터 외국인 선생님에게 배워 보기로 마음 막었다. 친구는 무섭다며 한국 선생님 수업을 신청했고 우리는 각자 다른 교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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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외국 어학원 영어수업.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온 힐러리 선생님. 50대 정도로 보였고 체격이 굉장히 좋고 영어를 말할 때는 목소리는 아주 나긋나긋해서
마치 외국인 할아버지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의 나는 외국인을 실제로 본 것이 거의 처음이었다. 너무 부끄러웠고 혹시 나에게 말을 걸까 봐 겁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한 달 동안 고개를 책상에 파묻은 채 선생님의 눈길을 피해 가며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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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하시던 말의 절반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 사분의 일 정도나 이해했을까.
그래도 이상하게 대충 눈치로 상황을 따라가며 무조건 외워서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이 우리에게 말했다.
각자 영어 이름을 지어보라고.
순간 교실이 조금 시끌벅적해졌다.
앞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하나씩 영어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예쁜 이름들이 앞에서부터 하나씩 나왔다.
나는 맨 마지막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그 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미 예쁜 이름들은 앞에서 다 나와버렸다.
내가 지을 만한 이름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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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중학교 영어 교과서 첫 페이지에서 보던 문장이었다.
“Hi, Jane.”
교과서에서 늘 보던 그 이름.
선생님이 내 영어 이름을 물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거의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작게 말했다.
“Jane…”
그렇게
나는 Jane이 되었다.
그렇게 지은 이름이 지금까지 20년 넘게
내 영어 이름이 될 줄은 그때는 미처 몰랐다.
이 이름이 미국에서는 옛날 이름. 할머니들이 쓰시는 이름이라고 한다.
그래도 나는 이 이름이 참 좋다. 브런치 작가명을 정할 때도 망설임 없이 이 이름을 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