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산지 증명서
밤 9시.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도란도란 속삭이며 다리를 주물러 주다가
나도 모르게 함께 잠들어 버렸다.
아이를 재워 놓고
미뤄 두었던 일을 조금 하고 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피곤함이 먼저 나를 데려갔다.
개학 이후
아침이 빨라졌다.
일찍 잠드는 것이 습관이 되었고
밤을 버텨 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오랜만에 인도네시아 거래처에서
주문이 들어왔다.
기뻐해야 할 일인데
머리는 지끈거리고
마음은 괜히 무겁다.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이면 되는 일인데도
왜 이렇게 시작이 어렵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나는 안다.
인도네시아 일은
돈이 많이 남지도 않는데
서류가 유난히 까다롭다.
하나씩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부터 먼저 눌린다.
눈을 떠 보니
새벽 두 시였다.
결국 몸을 일으켜
책상 앞에 앉았다.
노트북을 켜고
관세청 유니패스를 열었다.
1년 만이라
패스워드가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버벅거리기 시작한다.
패스워드를 찾으려 하니
범용 인증서를 새로 깔아야 한단다.
돈이 아까워
일반 인증서로 버텨 보려 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새벽 두 시.
이 시간에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시간과 돈
그리고 내 에너지를 갈아 넣어야
일은 겨우 움직이기 시작한다.
작년 기록을 뒤적이며
서류를 확인하다 보니
문제가 하나 더 나타난다.
원산지소명서
포괄확인서
제조공정도.
작년에 받아 둔 서류들은
이미 유효기간이 지나 있었다.
다시 받아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 사이트에 접속했다.
로그인부터
또 막힌다.
패스워드가 틀렸단다.
새벽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순간이다.
겨우 로그인에 성공했더니
이번에는 사용자 등록 갱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갱신비
55,000원.
결제를 마치자
이번에는 승인을 기다리라는 메시지가 뜬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29분.
결국
그들이 출근할 때까지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노트북을 닫았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집으로 돌아와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한번 시작했으니
끝을 봐야 한다.
그래야
내 머릿속 목록에서
이 일을 지울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사용자 등록 승인이 떨어졌다.
일반 비특혜 원산지 서류는
생각보다 수월했다.
9,000원을 결제하고
절차를 밟아 신청하니
발급이 되었다.
거래처에 메일을 보내고
서류를 스캔해 전달했다.
쿠리어 회사에
원본 발송도 맡겼다.
그제야
숨이 조금 놓였다.
주말만큼은
그나마
다리를 쭉 뻗고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월요일 아침.
인도네시아에서
메일이 도착했다.
서류가
조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전화를 거니
인천세관에 문의하란다.
확인을 거듭한 끝에
답이 나왔다.
한·아세안 FTA 원산지증명서.
이걸 발행해야 한단다.
결국
쉽게 돌아가려 했던 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는 잠시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조 거래처들에 전화를 걸어
다시 서류를 부탁했다.
또다시
아이를 재우다 잠이 들고
새벽 두 시에 눈을 뜨는 밤이 시작된다.
나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관세청 유니패스 화면을 연다.
좀비 같은 새벽을 보내고
아침이 되었다.
아이 학교 준비를 마치고
운전을 하고 있는데
출근 중이던 영미에게 전화가 온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늘 나를 위로해 주던 친구의 목소리.
그 순간
그동안 쌓여 있던 억울함이
무장해제되듯 풀려 버린다.
나는 결국
너무 힘들다고
아이처럼 토로하며 울어 버렸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니
그제야
조금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