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세우는 삶

예민한 게 아니라, 당연한 권리입니다

by 안녕제인


계단을 다 올라선 뒤, 나는 멈춰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아무렇지 않은 표정의 남자 동료가 서 있었다.


“밀어준 거야, 빨리 올라가라고.”


그의 말은 공중에서 가볍게 흩어졌지만, 내 몸이 느낀 감각은 불쾌한 무게로 가라앉아 있었다. 즉각적인 항의조차 나오지 않았던 건, 그 찰나의 순간에 수많은 자기 검열이 스쳤기 때문이다. '내가 예민한 걸까?', '이걸 문제 삼아도 되는 걸까?' 머릿속이 복잡한 계산으로 어지러운 사이, 나는 이미 전무실 앞에 서 있었다.


“방금 계단에서 누군가 제 몸에 손을 댔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문장이 입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해결의 실마리가 아닌, 난감함이 역력한 상사의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그 찰나의 정적 속에서 직감했다. 아, 이 조직은 이 문제를 해결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구나.


이야기는 불길처럼 번졌다. 순식간에 나는 '피해자'가 아닌 '이슈를 만든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차분하고 또박또박 상황을 설명했지만, 그의 변명은 너무나 손쉽게 면죄부를 얻었다. "도와주려다 그럴 수도 있지", "오해 아니야?"라는 말들이 방패처럼 그를 감쌌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보다,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더 큰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기묘한 구조 속에서 나는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친한 선배는 나를 불러 걱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상사들의 시선이 좋지 않다며, 사건을 키워서 얻을 실익을 따져보라고 했다. "결정은 네가 해야 해"라는 말은 응원이 아니라, 발생할 모든 책임을 오롯이 나 혼자 짊어지라는 서늘한 선고처럼 들렸다.


자리로 돌아와 앉아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했다. 신고, 소송, 언론 제보...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모든 전략적 고민 너머에 가장 선명하게 남은 단 하나의 진실이 있었다.


'이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이제 적당히 타협하며 침묵을 선택할 나이가 아니다. 어릴 적의 토나는 파장을 줄이기 위해 스스로를 접고 구겼다. 애매한 상황 앞에서 '좋은 게 좋은 것'이라며 나를 속였다. 하지만 그렇게 묻어둔 순간들이 쌓여 결국 나라는 존재를 가볍게 만들었음을, 존중받지 못한 경험을 방치하는 습관이 나를 얼마나 작게 식게 했는지를 이제는 너무나 잘 안다.


왜 내가 참아야 하는가. 누구를 위해 이 불쾌함을 억눌러야 하는가. 아무리 자문해도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참는 사람이 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세상이 정한 '유난스러운 사람'이라는 낙인이 두려워 나를 지우지 않을 것이다. 방향은 정해졌다. 나는 더 이상 이 일을 묻지 않을 것이며, 내 존엄을 지키는 일에 그 어떤 타협도 두지 않을 것이다.


방향은 정해졌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이면서까지 친절한 사람이 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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