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살이 Apr 19. 2024

"부장, 말 좀 똑바로 해주세요"

업무지시는 명확하게 부탁드립니다

▲사진=DALL·E3

처음 기자가 된 이후 많은 게 낯설었다. 발제도 낯설고 군대 이후 다시 접하게 된 기수 문화도 낯설었고 집배신은 또 뭔지...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낯설었던 것은 단연컨대 '부장어(語)'였다.


 "다들 발제가 쫑나지 않도록 해라."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처음엔 동기들끼리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했다. "야, 쫑나는 게 뭐야?" "나도 몰라" "마칠 종(終)을 말하는 거 아냐?" "발제를 마치지 않게 하라고? 그거 맞아?" 


이른 아침이었기에 우리의 작은 회의는 결론을 내지 못하고 일찍 마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는 부서에서 가장 인품이 올바르고 온화한 선배 A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발제 쫑나는 게 무슨 의미냐고. 근데 그 선배도 몰랐다. 경력으로 입사한 터라 부장과 함께 일한 게 오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선배도 한참을 고심하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본인이 총대를 멨다. 


부장의 답변은 타박과 함께 돌아왔다. "너네는 그것도 모르냐. 발제 겹치게 하지 말라고. 문맥을 파악해라." 우리는 다음부터 부장어가 등장할 때면 문맥과 눈치로 무슨 뜻인지 때려 맞추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십 년의 내공이 쌓여 만들어진 부장어를 매번 정확히 맞추는 건 힘들었고, 결국 타박을 받는 횟수는 늘어갔다.


단체 카톡방에서의 경우도 있다. "OO신문에서 이런 거 썼네." 부장은 기사 링크를 함께 올렸다. 기사를 참고하라는 건지, 우리도 OO신문을 따라서 처리하라는 건지, 관련 내용을 취재해 보라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이다. 그리고 저 날 해당 기사 관련 출입처를 담당하던 선배는 후속 취재와 후속 보도를 하지 않았다고 크게 혼났다. 


'그냥 부장에게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었지만, 경직되고 수직적인 우리 부서 분위기상 그런 '소통'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모르면 좀 물어봐라." 답답한 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몰라서 물어보면 화를 냈다. 결국 이런 악순환이 계속 됐고, A선배가 다시 한번 총대를 메게 됐다. A선배는 술자리에서 부장에게 직언을 던졌다. "부장, 가끔씩 쫑난다는 표현도 그렇고,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힘들 때가 있다.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화를 내시니 물어보기도 어렵다."라고 했다.


'부장은 그날 이후 180도 달라졌다'...처럼 동화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부장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는 계속 고통받았다. 다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할 때쯤 부장이 회사를 떠났다. 


업계는 좁다. 특히 언론업계는 더 좁다. 가끔 그 부장의 소식을 듣는다. '하루살이씨, 당신 OO일보에서 근무했었지? 거기 출신 데스크 업무지시가 아주 가관 이래.' 뭐라 할 말이 없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참 바뀌지 않는다고. 


이 부장을 겪고 나서 원칙이 하나 생겼다. '업무지시는 대중적 언어로 명확하게 하자.' 후배들이 나를 그 부장처럼 생각하지 않을지 되돌아보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너, '결식 기자'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