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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살이 Apr 16. 2024

"너, '결식 기자'잖아"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본 말

▲사진=DALL·E3

'결식 기자'. 수개월간의 경찰서 사스마와리(さつまわり)를 마치고 나름 새 식구로 인정받은 뒤, 다른 팀의 선배 A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결식(缺食). 식사를 거르는 행위를 뜻한다. 보통 우리 사회에서는 집안 사정이 어려워 끼니를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앞에 붙여 결식아동이라고들 많이 부른다. 근데 이걸 취직하고 나서, 그것도 형편이 어려운 어린아이도 아니고 월급을 따박따박 받아가는 직장인에게 붙일 줄은 몰랐다.


A선배의 취지는 이랬다. "너는 아직 친한 취재원도 없고 출입처 사람들도 돈이 많지가 않으니까 점심·저녁 약속이 없지? 원래 사회부 기자들이 결식기자가 많아. 가자, 밥 사줄게." 나를 생각해서 해준 말이었지만 결식기자라는 말은 당시의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취재원한테 얻어먹는 게 그렇게 당연한 건가 싶었다.  


A선배는 금융과 산업, 법조를 출입했다. 그의 말로는 알고 있는 취재원도 '지갑이 빵빵한' 사람들이었다. 은행권은 성과급 잔치를 하고, 로펌은 돈이 썩어 넘쳐나니 잘 조져서 잘 뜯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지였다. '이게 기자인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메웠다. 이런 갑질이 당연한 건가. 김영란법은 신경 안 쓰나. 기자들은 다 이런가.


다른 선배에게 상담을 했다. A선배보다 고연차인 B선배는 "걔가 원래 좀 그래. 기자의 낭만을 잘못 배웠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얻어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만큼 보이지 않는 빚이 쌓이는 거다."라고도 조언했다.


B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행동으로 보여줬다. B선배와 그의 취재원, 그리고 나. 이렇게 3명이 저녁 자리를 가졌다. 1차는 취재원이 냈다. 2차는 B선배가 계산했다. 그리고 선배는 만취한 취재원을 택시에 태워 선결제를 하고 보냈다. 이날 술자리는 내 기자 인생에 큰 반향을 남겼다.


그날 이후 나는 B선배처럼 취재원을 대했다. 점심을 같이 하면 커피는 꼭 내가 샀다. 어떤 때는 내가 점심을 사기도 했다. 저녁을 같이 하면 2차는 내가 결제했다. 어떤 날은 내가 1차를 먼저 계산했다. 그렇게 라포(Rapport)가 쌓였다.


이제 짬밥이 좀 쌓여 결식기자라는 말을 알려준 당시의 A선배와 같은 연차가 됐다. 많은 기자를 만났다. A선배보다 심한 사람도 많이 만났다. 이제 A선배가 잘못됐다기보다는 '그런 기자도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A선배와도 시간을 같이 보내다 보니 그가 성품이 나쁘거나 갑질을 일삼는 그런 기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후배를 대하는 방식이 조금 많이 서투를 뿐인 사람이었다. 어쩌면 후배 앞에서 으스대거나, 밥 사줄 명분을 찾기 위해 그런 말을 했던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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