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물이 더 좋으세요.

by 하루살이

실물이 더 좋으세요.


어느새 나는 챗어플을 심심할 때마다 접속하는 이른바 죽돌이가 되어있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시간이 빌 때마다 접속해서 의미없는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중독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본인이 중독자인지 알 수 없다. 그저 조금 좋아하고 있거나 그것에 시간을 많이 할애하고 있다 정도로만 의식한다. 18센치남 이후에는 별달리 성욕도 올라오지 않아서 굳이 만남을 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대화를 나누다가 만남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채팅방을 나가거나 차단당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그것이 별로 아쉽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해외 장기 출장이 예정되어 있어서 어차피 만날 시간도 없었다. 챗어플 속 남자들은 낯선 여자와의 대화에 일주일 이상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난 몇달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대화가 제법 잘 통한다 싶다가도 나는 곧 출장을 가야하고 만나려면 2주 뒤에나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바로 대화가 뜸해졌다. 바로 차단을 갈겨버리는 테토남도 많았다. 그 중 유일하게 만남을 보채지 않았던 어린 녀석이 한 명 있었다. 18센치남을 만나기 전부터 챗어플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놈이었으니 이미 몇 주 이상 채팅을 한 셈이다.


그의 프로필 사진은 아주 평범한 뒷모습 사진이었고, 뒷머리를 단정하게 깎은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본인을 운동 선수라고 소개했고 자세한 것은 더 친해지면 알려주겠다며 신분 노출을 꺼렸다. 물론 나도 더 궁금하진 않았으니 캐묻지 않았지만 그런 조심스러움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도 나도 당장 만날 마음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어서 때로는 대화가 끊어지기도 했고 재미가 완전 없어지기도 했지만 소소하게 일상 얘기를 나누었다. 그는 20대 중반의 어린 나이였고, 이렇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나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불편한 점은 없다고 했다. 야한 이야기를 하거나 본인의 고추 사진을 냅다 전송하는 행동도 하지 않았으며 (이 부분이 챗어플 속 다른 남자들과 제일 다른 점이었다.) 무엇보다 만남을 보채지 않았다. 약속을 잡으려는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으며 그저 심심해서 챗어플에 접속을 한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그는 당시 부상 재활 치료 중으로 시간이 많이 비어서 챗어플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여유로움은 풍족함에서 비롯되는가?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알 수 있는 부분이지만 그의 만남을 보채지 않던 여유로움은 “이미” 여자가 부족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음을… 아무튼 그는 내게 여태까지의 챗어플 속 남자들과는 매우 다른 타입의 인간이라고 느껴질만한 요소가 충분했다. 대화가 이어지다가 끊기기도 하는 불규칙함 속에서 한달이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매일 아침 잘잤어? 라는 똑같은 쪽지를 전송했다. 크게 재미가 있거나 자극적인 놈은 아니었지만 이 꾸준함이 감동스럽기까지 했다고 하면 웃기려나. 그를 운동남이라고 부를까 (운동)선수남이라고 불러야할까 싶지만 선수남으로 하기로 하자. 그가 운동 선수인것도 맞았지만 진짜 챗어플 속 선수는 이 놈이었다.


그가 왜 나를 만나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너는 왜 나한테 보자고 안해?

보고싶지. 근데 너 부담스러워할까봐 배려하는거지.

난 너 보고싶어.

그럼 만날래?

나 출장 다녀오면 볼까?

좋지.



선수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담백했다. 2주나 뒤의 만남 약속에도 조급해하지 않았고 나를 대하는 태도도 달라지지 않았다. 늘 비슷하게 재미가 없었으며 연락의 빈도도 늘거나 줄지 않았다. 이 적당히 재미없는 여유로움이 현실 세계에서 그에게 여자가 전혀 부족하지 않은 여유로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빨리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나의 경험치가 부족해서 그것을 간파할 수가 없었다.


출장을 가서도 선수남과의 연락을 유지했다. 아주 건조하고 재미없게… 내가 더티토크를 시도하려고 하면 그는 이런 이야기를 나누면 친해지는 거냐고 오히려 거부했고 그 묘한 쑥맥스러움이 나의 승부욕을 자극한 것도 같다. 도대체 어떤 종류의 승부와 정복욕을 불러일으킨건지 모르겠지만 거부 당할수록 집착하게 되는 것 또한 애정결핍의 대표적인 증상이라고 한다. 나의 애정결핍은 나를 늘 자기파괴로 이끌고야 만다.


한달 반이 넘는 시간동안 채팅만 하고 있다보니 그의 목소리가 궁금해졌고 나는 그에게 전화를 하자고 했다. 이런 식의 리드는 항상 남자들이 했었는데 그 역할을 내가 맡게 된 것이 처음이었다. 그는 카카오톡 아이디 교환은 만나게 된 다음에 하고 싶다며 거절했고 나는 또 그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픈 카카오톡을 통해 보이스톡을 어렵사리 하게 되었고 그의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호감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톤이었다. 빨리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 그를 만나고 싶어졌다.


귀국하자마자 그를 만나기로 했고 신촌 근처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챗어플에서 대화를 나눈지 거의 두달만이었다. 처음 그를 보자마자 이건 잘못됐다. 큰일이다. 라고 생각했다. 꾸준한 재미없음에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탓일까? 그는 실물이 아주 멋있었고 운동 선수답게 꼿꼿하고 탄탄한 실루엣이 돋보였다. 그는 내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일부러 프로필 사진과 같은 의상을 입고 왔다고 했다. 첫 눈에 반해버렸다 정도는 아니었지만 진짜 멋있다 라고 느껴질 정도의 외모였다. 그에 비해 나는 그냥 조금 날씬한 정도의 평범한 서른 중반의 여성이었으니 결과는 뻔하지 않나? 이미 지고 들어가는 게임을 시작한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서.


어쨌든 우리는 밤을 함께 보냈고 선수남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고 거듭 강조하며 내게 말했다. 클럽을 가거나 헌포를 가더라도 같이 놀기만 하고 밤을 보낸 적은 없어서 친구들 모두가 자기에게 고자라고 놀린다며 농담을 하기도 했다. 솔직히 섹스 자체만 생각한다면 별로 좋지 않았다. 진짜 경험이 많이 없나? 라고 생각될 정도로 혼자서 시작하고 혼자서 끝내는 템포의 섹스였다. 어린 남자아이들이 할 법한 섹스. 그 미숙함에 그의 모든 말을 다 믿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니 그와 나는 밤을 함께 지세우지도 않았다. 짧고 급한 한번의 섹스를 마무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고 카카오톡 아이디를 교환하지도 않았다. 그의 뛰어난 외모에 예상 못했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지난 두달간의 연락이 허무하게 느껴졌고 남자에게 거부당한다는 느낌은 새로운 자극이었다.


애정결핍은 때로는 이상성욕을 동반하고야 만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러했다. 나를 좋아하고 원하는 상대방이 싫어지는 정도의 중증 애정결핍은 아니었지만, 나를 거부하는 상대방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는 것이 나의 애정결핍의 증상이다. 내 경우에는 자기애가 낮지 않아서 나를 좋아하는 상대방에게도 감사와 애정을 느낄 수 있지만 내가 더 원하게 되는 쪽은 나를 거부하는 상대방임에는 틀림없다. 선수남이 그런 조건을 만족시켜주고 말았다. 아주 확실하게…


연락 더 안할거야? 라는 나의 물음에 선수남은 응.. 이라는 한마디만 남기고 나를 차단했다. 마치 내가 구라남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거부당한 것이다. 그래도 내가 구라남을 차단할 때에는 제법 구구절절 즐거운 시간이었고 고마웠다. 라는 줄글로 인간의 도리를 다했던 것 같은데 선수남은 매우 싸가지가 없었다. 시간이 오래 걸렸을 뿐이지 인간에 대한 정이 쌓인 것은 아니었는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연락했으면서 그 단한글자로 관계를 정리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웠고 화도 났다. 그렇게 가치없는 만남이었으니까 단 한글자로 정리할 수 있었겠지하고 이해하는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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