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한 연애의 나비효과
무엇이 나를 그렇게 익명성 뒤로 숨고 싶도록 했을까? 당시엔 익명성이 자유로움이라고 느껴졌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익명성으로의 도피라는 표현이 적절하다. 지난 연애에서 나는 9살이 어린 친구와 일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했고 만나는 동안 데이트 비용은 9할이 내 몫이었다. 남자는 사랑하면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하던가? 백수였던 그는 남아도는 시간을 내게 쏟아부었지만 돈만큼은 철저하게 아꼈다. 물론 그에게 내가 굉장히 고소득자로 여겨졌을 것도 같지만 어쨌든 이 불균형은 만남을 지속하는 일년이란 시간 동안 조금씩 나를 괴롭게 했음이 분명하다. 서른이 넘는 나이에 한참 어린 친구를 만나는 것도 모자라 미래가 없는 관계에 나의 돈만 쏟아 붓고 있으니 이 연애가 주변인들에게 떳떳했을리 없다. 그와 나는 사계절이나 연인 관계로 지냈으면서도 단 한번도 서로의 친구들에게 서로를 소개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자주 만나지 않았는가? 여행을 가지 않았는가? 전혀 아니다. 그와 나는 주 2-3회는 정기적으로 만났으며 무엇보다 성관계에 있어 서로 매우 만족했다.
당시 나는 서른 중반이었지만 남자 경험은 나이에 비해 적었다. 원나잇이니 fwb니 하는 것들은 전혀 나의 세계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단 한번의 경험도 없었고 그저 착실하게 연애하고 이별하며 살았다. 총 4번의 연애를 했었고 그 중 한 두번은 사랑이었고 한 번 정도는 결혼할 뻔도 했지만 어쨌든 모두 과거가 되었고 9살 어린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나의 5번째 남자로 이 전의 모든 남자들 가운데 가장 성관계를 즐길 수 있도록 해준 남자였다. 그는 외모적으로 거의 완벽하게 내 이상형에 가까웠다.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전희가 충분했고 껴안고 눕고 싶었다. 첫 눈에 반하는 관능적 끌림이란 것을 그에게서 처음 느꼈고 그 전으로도 이후로도 그런 경험은 아직 없다. 그의 얼굴과 신체가 나를 완벽하게 자극했기 때문에 언제나 만족스러운 섹스를 할 수 있었고 그도 나와의 관계에 만족했다. 우린 서로 더할 나위 없는 파트너였을지도 모른다. 근데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문제가 되어버렸지. 파트너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에 연애라는 이름을 붙여서 일년이나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섹스로 가득했던 그 만남은 결과적으로 나에게 큰 흔적을 남겼다. 그와 이별하고 난 뒤 나는 거의 무너졌다. 심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무너졌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이별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단순했다. 그에게 쓰는 돈이 아까워지기 시작했다. 가장 간단하고 확실한 시그널이라 생각했다. 남아도는 시간을 쓰는 건 어렵지 않다. 모두에게 소중한 돈을 쓰는게 어렵지. 그럼에도 이별은 역시 쉽지 않아서 두세번 정도를 깨졌다 붙었다를 반복했다. 완전한 이별 이후 나의 몸은 가소롭게도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사람이 본능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밤마다 혹은 혼자 있을 때마다 느끼게 되었다. 외로움에 사무친다고 해서 우리 만나서 섹스만 하자며 지난 연인에게 연락할 수는 없었다. 나름 체면이 있고 좋은 연인으로 기억되고 싶기도 했다. 차라리 화끈하게 그와 이별 섹스라도 했으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까?
나이가 서른이 넘어가면 어느새 나의 시시콜콜한 하루를 궁금해 해주는 친구의 숫자가 현저히 적어진다. 서로가 지치고 에너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들은 나에게 애정을 품은 상대가 아니면 쉽게 본인의 시간을 많이 내어주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이별에 대해 떠들고 싶었고, 상대방이 그저 내 이야기를 들어주기만을 바랐다. 끝도 없이, 내가 지쳐서 그만하게 될 정도까지 하염없이 계속 나의 망한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었다. 어느 날 너무 심심했던 나머지 앱스토어에서 대화 어플을 검색하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