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개인적으로 불교 공부의 백미는 붓다께서 밝히신 '法'(담마)을 깨닫는데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붓다가 활동하던 그 인도사회는 브라만 문명의 절정기였으며 학문적 종교적으로 소위 브라만교의 '담마' 개념이 모든 사람들의 종교와 철학의 세계를 지배했는데, 붓다는 그러한 허구적 '法' 개념을 갈아업는 가르침을 펴신 것입니다.
붓다의 '法'은 한마디로 너의 내적 차원에서 심의식에 비추이는 것을 보는 것이 '法'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法'을 바로 볼 때(정견을 갖출 때) 인생의 모든 苦에서 해방되는 길이 있다 라는 가르침 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면, 거울에 똥이 비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비쳐진 똥을 보고 냄새가 난다느니 어쩌구 하는 그 건 뭐냐는 거지요? 이걸 알면 '法'을 깨닫는 길에 들어 선 겁니다.
불교가 어렵다고들 하는데, 수 많은 에피소드들이 경전 형태로 방대한 양이 병존하고 있어 그 양에 압도 되어 그렇게 볼 수도 있고 번역 상의 문제점도 있을 수 있지만, 제대로 붓다의 말들을 따라가다 보면 일관되게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한 원리를 통찰하여 일관된 논리로 '현상이라는 덧에서 벗어나 해방이라는 자유'에 도달하는 어렵지 않은 가르침 입니다. 다만 기존에 형성된 인간사회가 공유하는 가치관의 체계가 惡하고 이러한 惡한 상식에 기반을 두고 열심히 사는 개인들의 혼란과 혼동이 바르게 사유하고자 하는 작용에 장애를 일으키므로 붓다의 말들이 어렵다고 느껴 질 뿐입니다. 일단 받아들임을 원칙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붓다의 길'이라는 새로운 등산로가 개척 된 것으로 조만간 정상을 경험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으로 제 경험을 통해서 확인 했습니다. 이 생에서 참 행복의 길로 빠져 나오는 유일한 길이 붓다의 '法'을 마침내 알고 삶에서 구현되는 이것 입니다!
요약하여 봅니다.
처음 출발은 '나'로 부터 하겠습니다. 온갖 경험(= 12처)을 '나의 것으로, 나로, 나의 자아로 보는 것'이 萬惡의 시작 입니다. '나'라고 '자아' 라고 실체(= '나가 있다' 라는 착각) 시 하는 것을 有身見이라고 하며 이 유신견이라는 착각 때문에 모든 고통이 시작 됩니다. 왜?
본래 '심의식'은 法 입니다. '法'이란 본질적으로 심에 찰라 찰라 비쳐지는 현상으로서 생기고 사라지는 성질을 가진 것 입니다. 즉 손에 쥐는 실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그 심에다가 실체로 착각 된 그 무엇을 담아 놓으려 하니 담겨지나요? 그래서 맞지않는 옷 입은 듯 매사가 어깃장 놓듯 괴로운 것이지요. 심에는 오직 法 만 담겨야 法다운 것이지요.
'나' 라는 것이 착각이면 이 숨쉬고 똥싸고 있는 이 건 뭐냐는 거지요? 붓다는 '五蘊' 이라고 불렀습니다. 즉 色受想行識의 복합체. 色은 물질작용, 受想行識은 정신작용(= 無色). 이러한 생명체 작용으로 36.5도로 불타다가 언젠가는 유통기한이 소모되면 사라지는 것. 심의 입장에서 五蘊을 보면 '色+名' 입니다. 그래서 名色이라고 경전에 누누히 언급되지요. 이러한 名色을 욕탐해서 심에 담으려 하니 마침내 고통의 절벽에 다다른다는 삶의 과정을 12연기로 붓다는 설명 합니다.
五蘊이 法으로 인식되면 해탈입니다. 이 과정은 아래와 같습니다. 五蘊 = 色界+無色界. '界' 란 심의 영역 안에 분별하는 識 작용이 그렇게 분별 해 놓은 겁니다. 五蘊 ---> 色界 + 無色界. '色界와 無色界'는 단지 심의 스크린에 그렇게 비추인 것이므로 이를 통틀어 '法界' 라고 합니다. 이제 마지막 이해의 고지에 오릅니다. 法界는 심의 인지영역에서 '界' 라는 현상이므로 바로 '法'. 모든 것이 '法' 일 뿐입니다. 일어날 뿐 사라질 뿐.
나 ---> 五蘊(= 名色) ---> 法界 ---> 法
모든 것을 'Simplify' 하면 쉽습니다. 거울에 비친 똥을 보면서 '아직도 냄새가 어쩌구 더럽구 어쩌구....'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