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통찰을 따라가면 도달하는 지점이 있다.
그 지점에 도달한 자들을 `아라한`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붓다의 통찰에 기반하여 五蘊을 그들 자신으로 착각하며 살아 왔다는 사실을 안 자들이다. 그리고 그 오온이 결국은 이 세상이었다는 것을 안 자들이다.
즉 이 세상이 그들을 착각에 빠트린 채로 그들 내부로 스며 들어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내가 그 무엇에 빙의 된 채로 무의식적으로 그 빙의에 따라 삶을 산다고 생각 해 보라. 이 얼마나 끔직한 일인가! 그런데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상이다.
五蘊이란 무엇인가? `色受想行識`이라는 물질과 정신작용이다. `色`이란 물질작용을 말하고 `受想行識`(名 - 정신이라 함) 이란 느끼고 알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정신활동이다. 이러한 작용이 있어야 만 생명체이고 특히 우리 안에서 이 작용이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인간이라고 부른다.
이 오온을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본질이다` 라고 보는 것이 `有身見`이라는 것이며 삶이 나락으로 가는 패착이라는 앎이 붓다의 통찰이다. 이것은 우리의 상식에 반한다. 그러나 어쩌라구 이것이 있는 그대로 사실인데!
문제는 사실을 착각하게 만드는 세상의 문명이며 이 문명은 인간들이 진화과정에서 만든 `제2의 자연`(The 2nd Nature) 이다. `The 2nd Nature`는 저명한 뇌과학자 인 제럴드에델만의 말년의 저서이다. 평생을 뇌와 신경과학을 연구한 뇌과학자의 결론은 인간은 본래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세상(개념의 세계) 이라는 가상의 세계 속이 건립된 인위적 환경 하에서 현실이라는 것을 공업적으로 체험 해 가며 스스로들을 현실에 있다고 무의식으로 받아 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붓다는 이러한 현상을 일찌기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지수화풍을 지수화풍으로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명색 만을 아는 것이고, 우리의 식은 명색을 너머서지 못하고 거기서 돌아선다`
돌맹이를 집어들며 내가 돌맹이를 직접 만진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나는 돌맹이를 직접 만날 수 없다. 왜냐? `나`라는 것은 착각이다. 실제로는 `수상행식` 작용(名)이 돌맹이(色)을 만나는 것이며 그렇게 아는 것을 `名色`이라고 한다. 오온은 나라고 착각하게 하는 그 무엇의 아바타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세상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인가? 마음(심의식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붓다는 No 라고 하였다. 사실 `그 무엇`은 신비이다. 알 수 없다. 無知다. 그러나 이 무지를 섣불리 `나다` 라고 받아드리는 착각이 우리를 無明에 가둔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이 無明이 원인이 되어 行들을 낳고 행이 원인이 되어 명색이 전개되고 명색이 육입(12처)으로 육입 때문에 觸이, 受가, 愛가, 取로써 有(존재의 착각을 확정)를 낳고 이것이 세상에서 生하고 老하며 死 하면서 우비고뇌(憂悲苦惱) 절망이라는 거대한 苦의 절벽을 체험한다 라는 `12연기`를 붓다는 설 하였다.
붓다를 통하여 눈을 뜬 자들은 상기의 `그 무엇`에 눈을 뜬 자들이다. `그 무엇`을 나로 착각하면 12연기의 굴레를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그 무엇`을 無我라고 하던데, 저는 개인적으로 무아라고 보지 않는다. 정확히는 `非我`다. 無는 동일한 어떤 성질의 것이 있음을 전재로 한다. 즉 `我` 라는 것이 있다 없다의 차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非`는 전혀 다른 것을 말하다. 즉 我와는 상관이 전혀 없는 뭔가의 다른 차원이라는 것.
이 생명체가 色이라는 물질세계에 참여 할 때 (왜 참여하게 되었는지는 여전히 신비 임) 그 생명체는 물질세상의 섭리 상 생명을 유지해야 하는 본능 때문에 `아는 기능`을 갖추어야 만 했다는 가설이 있다. 왜냐하면 생명 유지를 위한 환경이 모두 밖에 있으므로. 아는 기능은 외부지향 적 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갖추게 된 것이 오온. 여기서 `內部`와 `外部`가 갈라진다. (최소한 '그 무엇'은 '內로' 라는 것이 현재 나의 이해이다.) 內로 앎을 갖추어 밖으로 분별을 잘 해야만 생존에 유리하다. 이 유익함이 `善`이다. 이렇게 알아지는 것들이 `善法`. 선법을 발견하지 못했거나 善法을 따르지 않은 생명체들은 전부 멸종했다는 사실. `그 무엇`은 이 선법을 챙기는 기능이다. 그래서 `色受想行識`은 무한 진화를 거듭했는데 이들이 만나는 색들이라는 환경을 분별하는 유별난 기능을 `識`이 담당하여 非色 인 識이 色을 만날 때 `名色`으로 만나게 되는 원리 인 것이다.識이 본분에 맞는 작용을 하는 것이 正見. 예를들어, 은행원이 고객의 돈을 취급하자 흑심이 생겨나서 불법적으로 돈을 빼돌리는 짓과 같은 비유를 識에게 해 보자면, 식이 색을 만나서 名色을 축적하는 과정에 명색에 탐을 내고 사랑해서 名色들을 증폭시키어 이기적인 욕탐의 작용으로 빠져드는 현상이 邪見을 가지고 시작된 길을 걸어 12연기 고리의 결과를 맞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12연기설이다.
`그 무엇`이 正見을 갖추어 正思 正語 正業 正命 正精進 正念 正定의 삶을 살면 `그 무엇`은 거대한 苦의 절벽을 만나는 일은 결코 없다. 이것이 현재 이 삶이라는 인간이 쌓은 '제2의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苦痛의 현실에서 빠져 나오는 비결을 제시한 것이 2600여년 전의 붓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