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에 보면 참 흥미로운 언급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붓다의 가르침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안으로(빠알리어 원어로, 아자땅)'와 '밖으로(원어로, 바히다)' 라는 언급인데 붓다의 설법에 많이 등장하는 용어이다. 경전에는 이러한 '안으로 와 밖으로'는 오직 붓다의 제자들만 알아듣는 말이며 당시의 외도들이나 타 수행자들은 전혀 모르는 말이라는 언급이 있다.
제가 알기로는 오늘날 불교신자 조차도 아마 잘 모르는 용어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들 용어를 우선 간단히 설명하면,
'안으로'는 각자가 지닌 심의식 내부의 고유한 영역이다. '밖으로'는 그 심의식의 관점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다. 이 말만 들어서는 뭔 말인지가 확 와 닫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신에 대한 지속적인 사유와 관망이 필요한 수행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고유한 영역을 들여다 보면 아마도 '탐진치'가 있을 것이다. '밖으로'는 그 탐이라는 것이 달라붙어 요동치는 그 무엇들이 있는 영역이다. 이렇게 안으로와 밖으로에 대한 구분이 명확해 지는 이해의 차원에 다다르면 자신에게 대단히 이로운 정신적 성장과 심적 평정의 수준을 스스로 경험하게 된다.
'안으로'에 있는 그 탐이 심을 오염을 시켜서 '밖으로' 명색 만을 보게하고 그 명색에 영합 하면서 자신의 욕망의 세계를 확장 해 나가고 이를 당연시 하는 자만심으로 가득 채우게 되어 결국 눈이 먼 상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래서 붓다는 이 '안으로'의 영역에 '팔정도(정견으로 시작하여 정정에 이르는 수행의 길)'를 두도록 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면 밖으로 명색이 아닌 '법'을 보는 눈이 생겨서 모든 경험들에 대한 통찰이 성숙해져서 심의 요동을 벗어난 평정의 세계를 산다고 가르친다.
부언하면, ‘안으로’는 청정의 영역이고, 해탈의 영역이고, 삼매의 영역이며, ‘탐진치’와 ‘계정혜’(팔정도 수행의 내용)가 자리잡는 영역이고, 그 영역에서 ‘청정해지고, 해탈하고, 삼매에 들고, 계정혜가 자리 잡아야만’ 비로서 ‘밖으로’ 있는 그대로 보이게 되고, 집착하지 않게 되고, 흩어지지 않은 마음을 가질 수 있고, ‘앎과 봄’이 생겨나는 것인데, 우리 중생들은 ‘안으로’ 탐진치가 자리 잡고 있어서 ‘밖으로’ 보이는 것마다 명색(있다 없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등 자신의 뇌가 해석하는 경험들 만을 보면서 그런 착각된 줄을 모르는 상태) 만 보이고, 집착하게 되고, 흩어져서 산만하고, 아는 것이라고는 ‘있음과 없음’ 뿐이라는 말씀이다.
결국은, '자신 <-----> 세상' 이라는 구도를 상정 해 보면 그 중간에 있는 것이 삶을 좌우 한다는 것. '탐진치'를 둘 것이냐 '계정혜'를 둘 것이냐? 그래서 붓다는 경전의 초기에 '나는 中道를 깨달았다' 라고 하시는 언급이 있다. '中道'는 '팔정도' 다 라는 말씀도 있고, 나는 중도를 '滅道' 라고 해석한다. '탐진치'가 뿌리가 되어 만들어진 불선법(삶에 이롭지 못한 모든 것)의 세계가 滅하는 방도를 제시한 길이라고. 그래서 선법(삶에 이로움을 주는 것)의 세계가 펼쳐지면 결국 苦에서 苦滅로 해서 해탈하는 길. 불선법의 생성과 집적으로 苦의 절벽에 다다른 다는 설명이 12연기설이라면, 선법의 생성과 집적으로 불선법의 영역을 상쇄 시키는 '제로섬 게임' 같은 것. 불선을 滅하는 방법은 선으로 그 자리를 채우는 것. 어디에서? 중에서. 무엇과 무엇의 中에서 인가요? 그래서 '中道'를 발견 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