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작의'와 '올바르지 않은 작의'에 대해

by 김헌준 Hearn Kim

올바른 작의(作意)


예를들어 어제의 어떤 일을 떠 올린다고 할때, 어떻게 기억(念)이 떠 올려 지나요?

이미지의 형태다. 어디에서 떠 올리나? 의(心 → 意)에서다. 意의 주요한 작용이 作意로서 마음에 새김하는 작용이다.

作意에는 '올바르게 작의' 하는 것과 '올바르지 않게 작의' 하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올바른 작의는 무엇인가? 대상을 연기작용으로 보는 것(즉 集과 滅)을 보는 것이다. 集이란 , 앞에 어떤 원인과 조건이 있어서 (前法) 뒤에 어떤 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後法). 滅이란 그 원인과 조건이 사라지면 後法도 이어 사라짐이다. 대상을 있음(맞다, 좋다 등) 혹은 없음(틀리다, 싫다 등)으로 보는 것이 아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른 작의다. 그래서 올바른 作意 = 正見이다.


'集과 滅'을 보는 연기작용('법과 법의 관계'를 봄)에 의한 통찰이 가져다 주는 장점은, 선법의 集(생겨남)이 불선법의 滅(사라짐)이라는 것을 알게 됨이다. 集 한 것이므로 滅 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붓다의 팔정도가 바로, ‘선법의 집’이 ‘苦의 멸로 향하는 방도’라는 것을 알게 하는 수행의 길이다.


올바르지 않은 작의(= 癡)


그렇다면 올바르지 않은 작의 란? 대상이 意에 올바르지 않게 새겨지는 것인데, 새겨진다는 것은 마음에 떠올리는 작용이다. 뇌과학적으로 표현하면, 기억을 불러와서 현재의 경험을 뇌가 해석해 내어 행동을 결정하게 하는 것인데, 2600여년 전의 붓다의 표현에 의하면, 意는 Sati(念)를 의지한다고 하면서 意가 바른사띠(正念)와 함께 하는 것이 올바른게 작의 함이요 이 사띠를 잃어버린 상태로 작의하면 올바르지 않은 작의를 하는 것이라 했다.


그러면, 意가 사띠를 잃어 버리는(사라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앞서 기억이 떠올려 질 때 항상 이미지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했다 (오늘날 뇌과학에서도 하는 말이다). 이 이미지의 형태가 붓다가 말한 ‘니미따(相, nimitta)’이다. 作意란 意에 相(nimitta)을 새기는 것이라고 했다. 심의식은 대상을 경험(인지) 할때 반드시 그 대상의 相으로 경험한다. 그래서 그 대상들이 '名色'으로 불린다. 올바르지 않은 작의는 상기에서 설명한 것 처럼 대상이 '원인과 조건에 의해 그 순간 그렇게 포착되고 사라지는 현상임을 보지 못하고, 기 개념화 된 그 무엇 - 있다 없다, 좋다 싫다, 맞다 틀리다 등등과 같은 분별들 - 로서 마음(意)에 받아 들이는 것이다. 意가 사띠와 함께 있어 正見을 가진다면 상기의 '올바른 作意'가 되는 것이며 사띠가 사라져 올바르지 않게 相을 받아드리면 '올바르지 않은 作意'를 하는 것이다.


대상을 경험하는 방식을 불교적으로 표현하면, ‘육내외입처’에서 외입처인 ‘색성향미촉법’은 본래는 ‘모두 단수형’ 인데 그 ‘단수형’이 ‘복수형’으로 바뀌는 것은 ‘니미따(相, nimitta)’를 ‘올바르지 않게 작의(作意, =意에 새김, 마음새김)’ 하였기 때문이다. 원래 있는 그대로의 경험은 '안이비설신의'가 '색성향미촉법'을 만나는 것인데 올바르지 않은 작의를 하면 '색들 성들 향들 미들 촉들 의들'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 그 결과로 사띠가 사라지고 사띠가 사라짐의 폐해는 '탐진치(貪瞋癡)가 생겨남이다. 癡를 보라. 이 癡가 올바르지 않은 새김(作意)과 같은 것이다.


(相의 意에서의 생성, 증폭과정 및 식(識)과 ‘육내외입처’(=명색)의 관계에서의 相과의 관계 등등 본래는 ‘모두 단수형’이었던 육외입처가 ‘복수형’이 되는 것이고 ‘육식(六識)’이 연기되는 것 등은 향후 더 논의 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생략함)


오늘 여기서 중점을 두고 알아야 하는 부분은, 이 작의를 통해 어떻게 삶을 영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한 실천적인 관점이다.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니미따(相, nimitta)’ → 올바르지 않은 작의 → 탐진치 생겨남 → 다시 니미따(相, nimitta)에 집착함 (다시 올바르지 않은 작의에 들어) → 의(意)에 니미따(相, nimitta)가 다시 새겨짐(= 올바르지 않은 작의) → ① 불선법들이 생기고, ② 심(心)이 한정되고, ③ 사띠는 사라지고, ④ ‘올바른 삼매’에 들지 못하고, ⑤ ‘악하고 불건전한 위딱까’들이 생기고, ⑥ 까마(= 감각적 욕망)가 생겨나고.(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이 ‘복수형’ 형태가 되고), ⑦ ‘식(識)’이 밖으로 흩어지고, ⑧ 오온(명색)이 현현하고, ⑨ 생사(生死)를 겪고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현재 상식적이라고 여겨지는 이 세계를 살며, 무의식적으로 相들을 (意에) 받아 들이고 감각적 욕망에 따라 취사선택이 이루어 지는 인간개념의 삶의 방식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는 '올바르지 않은 작의'의 무한반복(윤회)을 피 할 길이 없다. 이는 '불교를 믿고 절하고 지성을 드리고 하는 종교'를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육근수호(六根守護)를 권장하는 것이다. '육근수호'는 구글검색 만 해도 내용을 알 수 있다. 아래에 붓다의 원음을 한번 들어보자.


"眼(∼意)으로 色(∼法)을 보고서(~분별하고서)는 그 相(nimitta)에 집착하지 않고 그 細相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眼根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 근심 등의 ‘불선법들’이 그를 침범할 것이므로 절제의 길을 따르고, 眼根을 보호하고, 眼根을 잘 지켜야할 것이다. 耳로 聲을 듣더라도 … 鼻로 香을 맡더라도 … 舌로 味를 맛보더라도 … 身으로 触을 느끼더라도 … 意로 法을 분별하더라도 ... 그 相(nimitta)에 집착하지 않고 그 다름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만약 意根을 잘 다스리지 않으면 탐욕, 근심 등의 ‘불선법들’이 그를 침범할 것이므로 절제의 길을 따르고, 意根을 보호하고, 意根을 잘 지켜야할 것이다."


'육근수호’나 ‘올바른 작의’를 배우는 것은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가 있다. 이 삶에서 번뇌를 떨쳐내고 마음이 자유를 체득하는 매우 지혜로운 삶의 비결이다. 이 비결은 붓다의 통찰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도달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의(意)에 새겨진 것은 심(心)에 제공 되는데 心에 올바른 작의를 통한 相이 제공 되어야 한다. 相을 올바르지 않게 작의 하였기 때문에 사띠가 사라지고 탐진치가 생겨나서는 心은 탐진치로 오염이 된다. 그래서 방법이,


"비구들이여, 비구가 어떤 相에 관해 그 相을 작의함으로써 貪瞋癡와 관련된 위딱까들이 일어나면, 그는 그 相과는 다른 善法을 일으키는 相에 관련된 작의를 일으켜야 된다. 그가 그 相과는 다른 善法을 일으키는 相에 관련된 작의를 하면, 탐진치와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위딱까’가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內로(= 안으로)’ 心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사띠와 작의'가 의(意)의 작용이라면, '위딱까'는 심(心)의 작용이다. 심(心)에 어떠한 相이 제공 되느냐에 따라 心의 상태(= 三昧)가 달라지는 것을 설하는 경문이다. "心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이와같은 '心의 개발'을 위해 공부하고 삶에서 구현 해 보겠다는 발심을 위하여 이 글을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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