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과 상(相) 그리고 心意識

by 김헌준 Hearn Kim


붓다의 가르침은 인간의 몸을 가지고 사는 현실인식이라는 경험 현상을 설명하는 인식의 작동원리에 대한 매뉴얼과 같다고 본다.


인간은 세상을 경험 할 때 직접적으로 세상을 경험 할 수 없다고 한다. 왜? 생명체에게 주어진 경험의 도구가 실제로 心( →意 →識)이기 때문이다. 이 心의 작용을 돕는 방식을 名(정신작용)이라 호칭하며 명은 '受想思觸作意' 라는 설명이 있다. 세상의 경험대상들은 물질이다. 이 물질을 色으로 호칭한다. 실제로 名과 色은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상반된 성질들이다. 여기서 心은 色을 名의 작용으로 파악하므로써 色을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은 心에 마치 名이 비추는 그림자 처럼 받아 드려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돌맹이를 집어들 때 직접 그 돌맹이를 아는 것이 아니라 名으로 파악 된 돌맹이라는 인식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것이 名色으로 파악되기에 간단히 말해서 모든 알아지는 것들이 名色이라고 불린다.


그런데 名과 名色 간에 주고 받는 매개체가 있는데 이것을 相(nimitta)으로 호칭한다. 이 相은 명색이 가지는 특징, 성질, 이미지를 총괄한다. 즉 名이 가지는 인식은 그 명색으로부터의 相이된다. 여기서 한가지 잠시 첨언하면. 心이라는 추상명사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몸(身)에 들어와 작용할 때 이를 意라고 호칭한다. 즉 意는 인식을 새기는(파악하는) 기능을 한다. 相을 파악하는 것이 意의 작용으로 이를 '作意' 한다고 한다. 이제까지 심의식, 명색, 상, 作意 이런 말들이 등장했다. 왜? 문제가 되는 것은 아래 경문을 보며 이야기 해 보자.


"無明에 덮이고 愛에 묶여서 현명한 사람에게도 이러한 身이 集起한다. 이 같은 身과 밖으로 名色이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두 겹’이 되고, 두 겹을 緣한 ‘六處에 있어서의 觸이다. 현명한 사람도 그것들이나 그것들 중 어느 하나에 접촉됨으로써 樂과 苦를 경험한다."


인간의 문제는 이 삶에서 '낙과 고'를 경험하는데 있다. 특히 苦라는 것이 心에 영향을 미치면 치명적이다. 극기야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지 않는가? 그래서 붓다는 이 苦라는 놈을 철저히 꿰뚫어 알아 내어서 해결책을 찿아내는 과정에서 이 삶의 원리와 그에 따른 인간(생명체)의 경험체계를 밝혀 내었다고 보기에 우리가 배워야 할 것 중에서 최상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동시에 붓다가 아니었으면 나는 절대로 알지 못했을 '앎'을 이 生에서 만날 수 있었다고 경탄하는 바이다.


다시 돌아오면, 意가 대상(名色)을 만날 때 그 名色의 相을 파악한다. 여기서 최초의 문제가 생긴다. 이 파악(作意)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대상에 대한 올바른 작의'와 '올바르지(합당하지) 않은 작의'의 두가지. '올바른'이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아는 것. '올바르지 않은 작의'는 '탐'이 개입된 상태. 소위 탐진치 라고 하는 어리석은 의식상태가 빚어내는 선택이다. 붓다에 의하면 '올바른 작의'의 결과는 궁극적으로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유익한) 상태를 의미하며 그래서 그 결과를 선법(善法)이라 했다. 그리고 '올바르지 않은'은 삶에 해가되는 것 이라고 해서 불선법(不善法)이라고 했다. 바른 '앎'을 쌓아서 선법으로 불선법을 소멸하는 삶의 원리를 위해 위와 같은 장황한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意가 올바르지 못한 작의로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왜곡하는 분별 혹은 망상적 앎의 과정으로 변질되는 것을 '識'으로 호칭한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인식과정이 心에서 →意로 →識으로 연기되는 과정이 '12연기설'이라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본다.


우리의 일상이란 이 몸이 갖춘 '안이비설신'으로 이러한 相들이 마구마구 솟아져 들어오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意의 작용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불교에 입문한 최초의 제자들을 일컬을 때 '意를 닦는 비구' 라는 언급이 있다.


사실은 명색이 心意識에 相을 제공하는데, 최초에 意가 올바른 작의로 相을 새기면(파악하면) 되는데 이를 실패하여 相을 ‘분별함(=나누어 앎)’으로서 相(nimitta)을 ‘복수형'으로 만들때 그러한 관련을 識의 출현으로 보며 그러한 분별함을 '識食’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識食을 공급하는 것으로써 識의 증장이라는 것이 이루어지고, 나아가 명색에 대한 行의 증장이 일어나서 명색의 증장이 계속 되는 원리.


인간의 삶이 어느 순간 얽히고 설킨 복잡다단한 번뇌의 상태가 탄생하는 장면을 경전에서는, 識과 名色의 호연연기(= 상호 의존하는 관계) 라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는 '識과 相(nimitta)의 관계'이다. (識食이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명색이 유지되지 못함, 여기서 食은 소위 '동력원' 혹은 '연료' 라는 의미를 지닌 불교적 용어)


*참고 : 識食 이란,

識이 相(nimitta)을 쫓아 밖으로 흩어지는 것이고,

識이 相(nimitta)에 거주처를 만들어 머무는 것이고,

識이 相(nimitta)을 ‘분별함(=나누어 앎)’으로서 相(nimitta)을 ‘복수형’으로 만듬


識이 만나는 相이란 실제로 6개의 相들이다. (眼과 色, 耳와 聲, 鼻와 香, 舌과 味, 身과 觸, 意와 法)에서의 色相, 聲相, 香相, 味相, 觸相 그리고 法相의 6相이다.


오늘은, ‘相(nimitta)’이 바로 ‘인식’이라는 것과 연결 된다는 이야기 까지만 하지요. 전체적인 여정의 스펙트럼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 身이 갖춘 6근6경(眼과 色, 耳와 聲, 鼻와 香, 舌과 味, 身과 觸, 意와 法)에 의해 觸이라는 현실이 당면하고 이것이 6識으로 생겨나면 본격적으로 苦(삶에서의 불편함 내지 괴로움)가 만연해 지는 識의 증장과 명색의 증장으로 준동하게 되므로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 6相이 法相으로 통합되는 원리와 그래서 붓다의 가르침의 지향점이 붓다의 法에 있음을 알고자 함이다.


새로 알게되는 용어와 논리전개를 만나면 대개는 황당함을 느끼며 피하는 반응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실제로 제가 공부한 방식인데) 이 황당함을 풀어내고 있는 너는 뭐냐? 하면서 자신의 이해가 도달하지 못하는 포인트를 하이라이트 하여 조목조목 따지고 들게 되면 언젠가는 알아진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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