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내용은 마침내 사성제를 깨닫는 것인데, 사실은 사성제를 깨달은 삶에 도달하는 수행의 방법을 말한다. 그 여정을 보여주는 약도(map)가 아래와 같다.
1. '집과 멸' (= 중도의 발견)
2. 팔정도 (= 계정혜 삼학을 요약한 막가)
3. 아빈냐의 증득 (= 행을 파악)
* 견성취 (입류)
→ 여기까지가 知集滅道 수행,
이후부터가 苦集滅道 수행 →
4. 지단증수(苦智→集斷→滅證→道修) (= 실천) Mahāsaḷāyatanika-sutta(커다란 여섯 감역에 대한 경)[MN.]
* 아빈냐(abhiññā, 수승한 智, 增知) 로써 지단증수
* 참고 : 지단수증(苦智→集斷→道修→滅證) [AN.]
5. 3전 12행
* '사마타와 위빠사나' 라는 것을 통하여 ‘3전 12행’
6. 사성제를 깨달음
이렇게 하여 사성제(苦→集→滅→道)를 깨닫게 되면, 이 삶에서 苦의 상태를 벗어남(해탈)에 도달한다. 그런데 단지 苦痛이 없는 '행복한 삶'을 영위 하는 것이 목표일까? 붓다가 진정 제시한 삶의 길이 여기까지란 말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사실 처음 붓다의 가르침(불교)을 접하고서 한동안은 명색, 오온, 法의 발견, 연기(12연기, 육육연기, 애지연기 등), '심에서 의와 식으로', 안으로 밖으로, 두겹 개념 등등을 배우고 이해 하느라 오랜 시간을 헤메곤 했다. 그 과정에서 이 모든 것들이 '길'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 출발은 마침내 '正見'을 이해하고 갖추는데서 출발해야 함을 알게 되었고 正見으로 출발하는 팔정도의 길을 걸음이 戒定慧를 지향해야 한다는 네비게이션을 확보했다. 계는 인간으로서 일종의 청정개념인데 참으로 그간의 비굴하고 위선적인 내 삶을 인정하고 나서부터 이 모든 배움의 진정한 출발이 된 듯 하다.
그렇다면 최종 목적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무척 어려운 이야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일단 쉽게 말해보자. 만일 지금 내가 교도소에 갖혀있고 이 교도소의 삶이 지옥 같다면 목표는 한가지 일 것이다. 그 교도소를 나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그런 곳으로 되돌아 가지 않아야 하겠지. 붓다는 그 비결을 우리에게 공개하신 것이다. 이 거대한 삶이라는 미혹의 영역. 신이니 천국이니 지옥이니 하는 찌라시급 거짓정보가 난무하는 혼돈의 영역에서 正見을 갖추고 출발하여야 만 마침내 名身과 色身의 붕괴라는 죽음에 이르렀을 때 왜 이토록 識이 타락하여 더러워지면 안된다고 했는지를 알게되는 차원을 만날 것이다. 세상을 마치기 전에 意를 닦아서 사성제를 이해하는 배움을 갖추었어야 함을 왜 알아야 만 하는지를.
아직 삶의 기회가 주어져 있을 때 한번 돌이켜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