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심리학

by 김헌준 Hearn Kim

오늘은 제가 불교를 공부하며 경험하는 작은 에피소드를 소개하며 붓다에 의해서 이해하게 된 '심리학'을 한번 정리 해 보고자 한다. 물론 '불교심리학'이라는 학문의 분야도 있고 기라성 같은 학자들의 논지도 있을 것이나 오늘 아래 내가 정리한 내용은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는 순수한 나의 경험담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점을 참고로 하고 읽어주시면 좋겠다.


경전을 통해 붓다의 말씀들을 쫓아가는 도중에 작년부터 심각한 고민이 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경전들의 번역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간 2600여년 이상 된 붓다의 원음을 각고의 노력을 통하여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전승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또한 붓다 당시의 언어가 빠알리(Pali)라는 고대어로 기록되어 전해져 왔고 숫한 우여곡절 끝에 오늘날에는 인도에서 반출되었던 원전이 스리랑카에 니까야경전이라는 형태로 보존 전승되어 있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원전의 내용과 번역상의 문제점을 의식하게 된 계기가 'vitakka' 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다. '위따까'는 일반적으로 '일으킨 생각'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vitakka가 나에게 문제가 되게 한 연유를 설명해 보겠다.

붓다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따라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아라한'이라고 하는 완전한 깨달음(반야)에 도달한 단계에 이르기를 지향 할 것이다. 거꾸로 잠시 설명을 하자면, 완전한 깨달음(사성제를 통한 해탈)에 이르기 전 단계가 '위빠사나'를 통한 붓다의 法(Dhamma)에 대한 깨달음이다. 위빠사나가 가능한 단계가 되기 위해 '3전12행'이라는 수행의 과정이 있고 이 과정에서 Abhiññā(證智)를 동반한다. 이러한 수행의 첫단추가 4禪定의 初禪이라는 바른삼매에 드는 수행이다. (8정도의 여덟번째 단계)


그런데 이 初禪이 4단계 선정에서 유일하게 'vitakka'가 있는 선정이라는 언급이 나오는데 ....,

"일으킨 생각(vitakka)과 지속적 고찰(vicāra)과 희열(pīti)과 행복(sukha)과 마음의 집중(cittekaggatā)이 ..." 함께있는 초선에 든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현실적인 문제 봉착했다. 물론 이해하기로는 禪定은 相(명색으로 부터의)에 대한 파악을 하는 과정에서 '法에 대한 위따까' 만을 하는 것이라고 이론적으로는 이해가 되는데, 일반적으로 이해 하기로는 相에 대한 올바른 작의를 하는 것은 意의 기능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왜 '올바른 작의'가 아닌 위따까가 초선에 언급 되는가? 라는 의구심에서 '위따까'의 언어적(어원적) 의미를 찿기 시작했다.


경기도 안산에 와 있는 스리랑카 스님들을 찿아가 여쭙기도 했고 알고 지내던 몇 스님께도 물어보고 또한 남방불교 수행을 하시는 도반들에게도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일으킨 생각' 정도의 이해 만을 말할 뿐 속시원한 파악이 될 정도의 대답들은 없었다. 결국 답답한 나는 작년 이맘때 부터 그렇다면 내가 스리랑카 현지에 가서 빠알리경전을 공부하며 현지에 계신 스님들로부터 답변을 구하리라 마음을 먹고 준비를 시작했다. 현지에 가기위해 주위 분들의 조언과 경험담등을 청취하며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는 못한 상태인데 그 이유가...


1. 현지에 가서도 답변을 들을 수 있는 선생님을 만나지 못한다면?

2. 그러한 선생님이 계시더라도 영어로 소통이 가능 할 것인가?

3. 무엇보다도, 과연 내가 궁금하 하는 분야인 빠알리 고대언어의 어원(etymology)을 내가 기대 할 만큼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여전히 있었다.


그러면서 현재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현재 번역된 경전 내의 vitakka와 관련한 문구들을 추적해 가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 나는 또 한번 놀랄만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간 무심히 읽고 지나치던 경전의 문구들이 새롭게 살아나며 나의 의식을 새롭게 깨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니 붓다께서 이렇게 자세하게 우리들의 인지과정(인식과 생각 과정)을 상세히 언급하며 강조하시는 이유가 도데채 무얼까?'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경전 안에 내용들을 따라가며 내가 이해한 수준을 한번 소개 해 보겠다.


1. 인간(혹은 생명체)은 '알아차림(sampajāna)'을 가진 존재라는 것.

"비구가 어떻게 sampajāna를 가진 존재로 있는가? 비구가 受(느낌)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유지되는 것을 알고, 사라지는 것을 안다. Vitakka가 일어나는 것을 알고... (동일), 想들이 일어나는 것을 알고... (동일). 이와같이 비구가 sampajāna를 가진 존재로 있다"


2. 나는 이 sampajāna 라는 기능을 心이라 부르고자 한다. 즉 인간이 心의 기능으로서 알아차림이라는 삶의 경험에 참여 한다고 이해한다.


3. 경전에 "界를 조건으로 心에 想(Saññā), 見, vitakka가 생겨난다" 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vitakka는 想처럼 心의 기능에 속한다. 다른 경전부분에, 心의 기능을 설명하며 名(Nāma)이라는 이름으로 '受, 想, 思, 觸, 作意'가 心行에 속하는 기능이라는 언급도 있다.


4. vitakka가 직접 언급된 경전 부분을 찿아보니, "비구여, 비구가 자주 vitakka 하고 vicāra 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점차 心의 경향이 된다" 라고.

"Kama(감각적 욕망)에 대한 vitakka가 色(Rūpa)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 心

으로 따라가며 vitakka 하고 vicāra 한다. 이렇게 욕탐의 원인 인 法들을 대상으로 心

으로 따라가며 vitakka 하고 vicāra 하기 때문에 欲(chanda)이 생긴다.... 欲이 생긴자는.... 이와같이 心에 탐을 갖추어 결박 된다고 말한다.", "세간은 무엇에 결박되어 있나? 무엇이 그것을 추진 하는가? 무엇을 끊어야 열반이라고 말하는가? 세간은 '환희'에 결박되어 있다. vitakka가 추진한다.

愛를 완전히 끊으면 열반이라고 말한다." 등등. 이외에도 수없이 많지만 vitakka가 心차원의 어떤 기능 임은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 재미있는 비유도 있다.


"비구여. 낮에 행한 것에 대해 밤에 vitakka 하고 vicāra 하는 것이, 밤에 연기를 내뿜는 것이다. 밤에 vitakka 하고 vicāra 한 것을 낮에 (신구의 3행) 행위에 적용(개입) 시키는 것이 낮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낮과 밤? 그리고 연기피움(안으로 타들어 감)과 온 천지에 드러난 불과 열기(밖으로의 행으로)?


여러모로 사유 할 가치가 있는 언급인데... vitakka는 心차원에서 意차원의 본격적인 作意(마음에 새김 혹 파악하는 작용)가 되기 이전의 그 어떤 마음(생각)의 기능이라는 잠정적인 이해를 가지고 아래와 같은 사유를 계속한다.


인간의 인식과정의 정신활동에 대해서 경전에 이런 설명이 있다. "眼과 色을 緣하여 眼識이 일어난다. 삼사화합이 觸, 觸을 緣하여 受가, 受 한 것을 sañjānāti 하고 sañjānāti 한 것을 vitakka 하고 vitakka 한 것을 papañca(번잡한 생각으로 증폭된 생각) 한다." '12연기설'에서도 6번째 고리 인 촉부터 이후 설명이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순서 임을 볼 때 '受 한 것을 sañjānāti 하고' 부분은 受→想(Saññā)이다. (sañjānāti는 Saññā의 동사형) '想(인식)하고'의 의미. 그러면 想(인식)하고서 vitakka 한다는 것. 뇌과학적으로 해석을 하면 뇌는 사실과 사실이 아닌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자극된 그 자체만을 기존의 환경데로 받아들이는 앎이 sañjānāti 라는 알고 이다. 그렇게 알아진 것을 vitakka 한다는 것인데 그러면 이 vitakka는 意가 하는 (올바른 혹은 올바르지 않은) 作意라는 생각기능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단 vitakka도 作意도 일으키는 생각작용이라면 차이는?


나의 이해는 이러하다. 앞서 경전에서 본 것처럼 心의 기능으로서 알아차림(sampajāna)에 수와 상 그리고 vitakka가 있었고, "心

으로 따라가며 vitakka 하고 vicāra 한다", "자주 vitakka 하고 vicāra 한 것은 무엇이든 간에 점차 心의 경향이 된다" 등등에서 보듯 vitakka는 心 차원의 활동이다. 그렇다면 心차원과 意차원은 별개의 것이라는 해석이 된다. 意차원은 본래 心이 인간과 같이 물질 身이 생겨나 身 안에 들어와서 활동하는 정신을 意작용이라 하고 구체적으로 作意를 통해 身行을 진행한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경전에도 '12연기'(心차원)와 '육육연기'(意차원)가 별도로 설명되고 있다고 본다.


여기서 경전에 수없이 설명되는 붓다의 심리학을 도출해 보면 이와같아 보인다. 우리가 알아져서 생각하게 되는 단계가 있음을 붓다는 통찰 하셨다고 본다. 알아짐(sampajāna)의 베이스는 심차원이다. 대상세계라는 현실에서 쏫아져 들어오는 수와 상에서 먼저 (본능적) sañjānāti 하게되고 무지(무명)한 상태에서 뇌의 기억회로에 쌓인 그대로 반응하는 생각작용으로 흐름이 식차원의 vijānāti(분별하여 생각한다)이다. 여기서 우리는 心(Citta)→意(Manas)→識(Viññāna)으로의 정신작용의 연기상황을 이해하게 된다. 상기의 vijānāti는 識(Viññāna)의 동사형태 분별하다 라는 의미이다. 세상이라는 고통과 혼란의 원인이 識(분별, 간택)이 만든 부정적 역할 때문이다. 識으로 생존환경에서 존속하는 판단을 하는 선순환도 있지만 이러한 정신작용에 대한 통찰이 없으면 결국 識이 망치는 고통의 세계에 빠지게 되므로, 붓다의 가르침은 意에 방점이 있다. (그래서 中道 혹은中途). 알아짐에 대한 올바른 작의가 대상으로부터의 상에 대한 바른 새김(파악)이다. 이를 위해 意에 Sati를 세워 올바른 작의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육근수호→팔정도→사성제(해탈)의 길이다. 이를 'sampajāna' 관점에서 보면 sañjānāti → ( ) → vijānāti. 즉 vijānāti로 가기 전에 그 흐름을 끊는 생각작용이 vitakketi(vitakka 하는것). 즉 의에서 대상현실의 상을 바로 파악하여 相이 非相 임을 아는 법에 이르기 위한 '법에 대한 vitakka'를 해야 하므로 初禪에 vitakka가 언급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이해에 서 있다.


문제가 시작된 '初禪'(제1선정)으로 돌아가 보면, " ... vitakka와 vicāra가 있는 초선을 성취한다" 라고 했다. 경전에 의하면 4禪定은 色界禪定이다. 이 말은 無色界 禪定이 아니라는 말이다. 붓다의 수행이 당시의 인도에 만연한 최고의 수행들과 대비되는 점이 無色界 禪定 → 色界禪定으로의 길을 발견 하신 것이다. (中道의 발견)


無色界란 요즘 흔히 '명상'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정신세계로 안착하는 방식의 수행으로서, 붓다께서도 당시 최고 수준의 명상에 들었었지만 깨고 나오면 현실의 상황은 그대로 임을 아시고는 이것이 궁극의 깨달음이 아니다 라는 확신으로, 현실에 내재된 苦(生老死)와 불안정, 불완전, 불만족의 현실상황을 벗어나는 진정한 해탈의 길을 찿은 것이 色界라는 물질세계의 현상을 꿰뚫어 통찰하는 깨달음을 찿아내어 '팔정도 → 사성제'에 이르는 불교의 가르침을 완성한 것이다.


* 혹시 빠알리어에 더 능통하신 선생님이 계셔서 상기의 제 이해 부분에서 오류를 잡아 주실 수 있으시다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선지식이신 여러분의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작가의 이전글명색과 상(相) 그리고 心意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