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無上正等覺

by 김헌준 Hearn Kim


불교를 좀 아시는 분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최고의 지혜(반야), 무상정득각(無上正等覺)으로 언급한다. 나 역시 60여년을 살아오며 기독교를 위시한 종교, 동서양 철학, 인문학과 물리학 등등의 앎의 분야에 관심을 가지며 공부해 왔는데, 뒤늦게 불교를 알고서는 나 역시도 無上正等覺이라는 고백에 동참하게 되었다. 왜?


나의 경우에는 인간으로 이 生을 살아가며 두가지 궁극적인 질문이 있었다.

1. 나라는 존재가 왜 이런 물질계(지구)에 등장하게 되었나?

2. 대체 이 물질우주는 왜 이렇게 있는건가?


깨달음을 이룬 붓다의 경우도 젊은시절에 '생노병사'가 대체 왜 있지? 그리고 어떻게 이 '생노병사'를 초월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궁극의 법을 갈구하여 출가 후 수행, 고행, 그리고 중도의 깨침을 통해 마침내 마지막 正覺에 도달했음을 밝히셨다. 뿐만 아니라 인류역사를 통틀어 왠만한 사람들은 유사한 질문을 품고 밝히려 살아왔음을 우리는 잘 안다. 특히 의식의 도약을 거듭해 온 현대 물리학자들은 20세기 이후 (인문)철학자들을 추월하는 고도의 사유를 쏫아내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우주에는 존재는 없고 관계만이 있다는 둥, reality is not what it seems.. 등). 여기서 일찌기 붓다가 언급했던 진리탐구의 길을 한번 들여다 보자.


"비구들이여, 苦에 대한 앎(ñāṇa, 智), 苦集에 대한 앎(ñāṇa, 智), 苦滅에 대한 앎(ñāṇa, 智), 苦滅로 향하는 방도에 대한 앎(ñāṇa, 智)이라는 것을 明(vijjā)이라 부르고, 이런 방식으로 明(vijjā)에 도달한다."

[SN. vol.5. p.430]


여기에 明(vijjā)이란 것은 당초에 제기했던 궁극적 질문에 대한 해답이다. 그런데 이 무슨 苦集이니 苦滅이 나오나? 나는 이 明(vijjā)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붓다가 제시한 사성제(苦集滅道)의 스펙트럼이 우리가 처한 삶의 문제와 그 탈출구 등을 함유하는 지혜일 뿐만 아니라 (제대로만 이해 할 수 있다면) 한계적인 인간 상황에서 초월적 우주원리와 구조 등을 파악 해 갈수 있는 유일한 사유방식을 열어주는 '천기누설'적 비결 을 제시하는 것 임을 알게 되었다.


불교는 결코 종교차원의 문화적 산물이 아니다. 붓다가 제시한 '지혜의 개발'은 21세기 현대물리학자들이 여전히 해결코자 애쓰는 미세입자의 세계 구조나 거시적 우주에 대한 기존의 패러다임 등을 초월 할 수 있는 혜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여전히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는지? 현재도 우리가 경험하는 이 우주와 같은 다른 우주가 공존 하는지? 이런 것에 눈뜨지 못함이 無明이고 이것을 알 수 있음이 명인데, 상기 경전에서 말하듯 붓다는 明에 도달했고 우리도 明을 증득 할 수 있다.


明을 지향함은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가 당면한 진화적 본능 일 수 있다. 빅히스토리를 통해 알게된 그 지난한 생존본능의 진화적 과정을 잠시라도 사유해 본다면 그 苦의 무게를 당신은 상상이나 하겠나? 이러한 거친 물질 환경에서 생명체가 살아 남으려고 몸부름 친 그 궤적이 心의 탄생과 心意識의 순차 연기구조를 통한 정신적 변형이 물질적 변역을 가져오고 그 물질적 변역으로 또 정신이 변역하고.... 했던 지난 한 과정을 붓다는 인간이라는 상황 하에서 볼때 身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識과 名色'의 호연연기로 통찰해서 현재에 이르른 인간의 운명이 苦集을 불러와서 苦滅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으로의 흐름. '의식의 흐름'과 '물질의 흐름'이 진화적 산물로서 오늘날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제로 등장한 것. 이와 동일한 구조가 우주의 내용물에 대한 이해와 상의상관된다.


이해에 접근하기 위해 예를 들면, 인간이 상황을 있는 그대로(緣起적 구조) 바로 보아야만(正見) 해결책에 도달할 수 있다 라는 공식을 붓다는 전제했다.

'緣起적 구조' 란, 앞선 그 어떤 조건과 원인이 있어(A) 현재적 상황 속에서 새로운 그 어떤 상황이 생겨난다(B) 라는 구조다. 따라서 A와 B는 다른 것도 같은 것도 아닌 관계의 문제다.

그리고 그 생겨남이라는 것은,

1. 생겨나야 만 하거나 (어떤 해결을 향해),

2. 생겨 날 수 밖에 없거나,

3. 생겨남이 그 어떤 조건과 원인으로 촉발 되었기에 그 원인과 조건이 소멸하면 그 생겨남도 소멸한다.

4. 따라서 그 생겨남이란 그 어떤 절대적 실체가 아니라 조건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비는 왜 오는가? 무거운 하늘의 구름(수분덩어리)이 중력작용에 의해 부셔져야 하늘의 평형상태가 유지된다.

배고프면 왜 밥을 먹어야 하는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다(다시 먹을 필요가 없기 위해)...

왜 숨을 내 뱃어야 하는가? 다시 새로운 숨이 들어 오기 위해서다.

화(anger)는 왜 일어나는가? 그 화가 해소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해소되는 길은 일어나서 사라지는 길 뿐.


모든 것은 그냥 있는그대로 흐르고 있을 뿐. 그냥 두면 된다는 것. 그런데 어디서 문제가 경험 되던가? 항상 그 누군가가 등장한다. 내가 불편하지 않기위해 비가 오지 말아야 하고, 나의 밥이어야 하고 이런 밥이어야 하고 저런 밥은 싫고, '들이쉬고 내쉬고'가 불편한 그 누구가 있다. 그냥 한번 움켜쥐면 그 것이 계속 유지되면 좋겠고(돈이나 행복처럼) 싫은 건 오지 않았으면 싶고...


集(生)하였으니 滅해야 하는데, 集 한것은 滅하기 마련인데. 모든 것에서 '이것은 나의 것이고 이것이 나이고 이것이 나의 본래의 것(실체)' 라고 보는 見이 正見이 아닌 邪見이다. 사견의 길(八邪道)을 걸으면 苦集, 正見으로 길(八正道 라는 心路)을 걸으면 苦滅.


苦集이 苦滅로 바뀔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지혜다. 苦集이나 苦滅이 변화 할 수 없는 그 어떤 실체였다면 인간에게는 기회가 있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실체화 시켜 중간에서 공포장사 해 먹는 것들이 모든 종교장사아치들. 그러나 붓다는 분명히 말했다. "나는 中道(팔정도)를 깨달았다". 무엇과 무엇의 中에서 벌어지는 상황인가?


그대의 心과 대상들(경험, 세상에 대한 인식) 사이에서.


배고픈 이유(밥을 먹어야 하는) = 더 이상 배고프지 않기위해(더 이상 밥 먹을 필요가 없기 위해).

그렇다면? 왜 태어나는 것이지? (= 더 태어나지 않기위해?)

더 태어남이 없는 조건을 위해서 그대는 지금 어떠한 삶을 살고있고 어떠한 의식 속에 있는가를 한번 자문 해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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