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AEkie May 13. 2024

바보야 문제는 돈이야  

뉴욕 공립 초등 PTA의 돈과의 전쟁.

요즘 'Abbott Elementary'라는 미국 드라마에 푹 빠졌다.

필라델피아 공립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 시트콤인데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사실 아주 예전에도 몇 편 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미국 학교 따위 남일이라 관심도 없고 너무 평범하고 착하기만 한 내용에 보다 말았었다. (원래 내 취향은 일단 인적 드문 곳에 시체부터 발견되고 시작되는 장르 쪽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애들 키우는 엄마가 돼 보니 장면 하나하나가 가볍게 지나칠 수가 없다. 아 어찌나 미국의 공교육 현장은 이렇게 험난 한 것인가.  

가벼운 시트콤 좋아하시면 추천하는 Abbott Elementry

 매회 창의적으로 사고 치는 주인공 본인과 동료 교사, 아이들(사실 따지고 보면 가장 사고를 안치는 집단은 아이들이다. 언제나 그렇듯)과 그걸 어떻게든 해결하는 주인공 본인과 동료 교사, 아이들 이야기인데 시즌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큰 줄기는 부족한 교육 재정이다.

 드라마뿐만 아니라 현실도 마찬가지다. 애들 필드 트립이나 급식 먹는 수준만 봐도 얼마나 재정적으로 부실한 지 빤하다. 얼음 바람 부는 한 겨울에 텅 빈 야구 경기장으로 필드 트립을 간다. 무료라서 그렇다. 악명 높은 미국 급식에 그나마 한 줄기 빛처럼 구운 채소가 있는데, 냉동 채소를 가열하는 것뿐이라 식감이 영 엉망이다. 현장에서 조리할 사람 구할 예산이 없기 때문이다.


 동네에서 안면을 트게 된 전직 교사 출신의 미국인 할머니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애초부터 공립학교 운영에 필요한 모든 재정을 지원해야 되는 의무가 없다고 한다.

'예산이 충분하면 좋겠지만, 모자라면 학교 PTA(Parent Teacher Association)에서 알아서 해야지 뭐.'가 정부의 스탠스라는 거다. 에잉? 공립학교인데 알아서 하라고요?

 

 저출산 때문이든 뭐 때문이든 애들 공책까지 사서 쥐어주는 한국 초등학교의 부모들이라면 받아들일 수 없겠지만, 평생을 그게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아온 미국 부모들은 진짜 알아서 한다. PTA에서는 재정 확보를 위해서 수많은 이벤트를 기획하고 운영해서 수익을 만들고 별별 핑곗거리를 다 찾아서 기부금 독려하는 메일을 뿌린다. 처음에는 PTA 회의에서 엑셀 깔아 놓고 돈 이야기만 한참 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그게 바로 PTA의 존재 이유였던 것이다. (구글에 PTA Fundraising이라고 검색해 보면, 온갖 자료와 아이디어가 쏟아진다.)


 학교의 거의 대부분의 이벤트는 사실상 학교 재정을 확보하는 목적으로 진행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이들이 즐기기도 하지만). 학교 운동장에 에어바운서 몇 개랑 팝콘 기계 몇 대 들여서 핼러윈 행사를 해도 티켓을 사야 한다. 엄마들이 일일이 장 봐서 자기 나라 음식을 직접 만들어 참여하는 International Dinner 행사에도 엄마들의 인건비가 무색하게 아이들은 일일이 티켓을 사야 한다. 아이들 권장 도서를 싸게 파는 온라인 사이트를 안내하면서도 마지막에 학급 코드를 꼭 넣어달란다 구매 금액의 몇 %는 결국 학급비가 된다면서. 급기야 학교 경매에 선생님들과 따로 소풍을 간다던가, 하루 동안 교장 선생님의 업무 파트너가 된다는 특별한 경험들이 상품으로 올라왔다. 돈을 가장 많이 낸 부모의 자녀가 그 혜택을 누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한국 학교였으면 경을 칠 일이다.   

워런 버핏과의 점심이 경매에 오르는 나라라 역시 다르다

 한국 부모들은 이런 행사나 기부에 선뜻 지갑을 열기가 쉽지가 않다. 물론 급등한 달러 환율 때문에 10불짜리 한 장에도 덜덜 떨게 되는 현실적 제약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단 너무 낯설다. 스승의 날에 선물 사 오지 말라는 공지 문자를 한 달 전부터 받는 우리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특히 지역 사회에 깊이 뿌리를 박을 요인이 아무래도 덜한 주재원이나 단기 파견직 가족들은 더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그 결과 아이들이 본의 아니게 무임승차 하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누구 부모가 돈을 많이 냈는지를 따져 묻거나 그 때문에 아이들이 불이익을 받는 건 아니지만, (내가 잘은 모르지만, 공립학교 선생님들이 그런 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할 열의가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부실한 미국 공교육 시스템에서 어떻게든 양질의 교육을 시켜보겠다는 열의의 과실만 따가는 사람이 되더라. 다른 건 몰라도 남한테 폐 끼치지 말라는 교육은 확실히 시키는 한국 교육 시스템의 수혜자로서 못 견딜 일이다.

 오늘도 한참 고민 하다가 Teachers Appreciation Week (미국도 5월에 선생님 감사 주간이 있더라. 스승의 날처럼) 기부금 결제 하고 학교 경매의 말도 안 되는 상품에 적지 않은 금액을 써서 냈다. (제발 떨어져라)

  

  정말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미국의 공교육이 '아직' 살아남아 있는 것은 어떻게든 재정을 확보하려는 부모들의 열정 덕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쁜 와중에도 학교 운영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내가 알고 있는 PTA 부모들은 대부분 Full-Time 전문직이다. 잠은 언제 자나 몰라) 아이들을 셋이나 키우면서 학군지에 이사 가 볼 생각만 해봤지, 좋은 학교 만드는 데 기여할 생각을 못해본 나로서는 반성도 된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공교육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지역 사회의 소득격차가 교육 수준으로 이어지는 것을 공교육이 막지는 못할 망정 이렇게 방조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미국이야 남의 나라지만, 공교육 예산을 지속적으로 감축하겠다는 우리나라 기사를 볼 때마다 불안감이 몰려오는 것은 그저 나의 기우이기를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맨해튼에서 어린이집 보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