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것 6

시절 인연 vs 평생 인연

by CE Lee

3월 새 학기를 앞두고 반 배정 발표를 시작으로 한동안 긴장을 풀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에 마음이 쓰인다.

반 배정이 공개되고 나면 같은반 친구들과 선생님과 한 해를 어떻게 보낼지 아이들은 이리저리 나름의 궁리를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지나고 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대부분의 시답지 않은 관계에 절절매는 모습이 귀엽기도 하지만, 그 시절 친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기에 마음이 쓰인다.

1-2주 정도 시간을 갖고 지켜보면 마음이 맞는 친구가 반에 없을 리 없다고, 그러니 섣불리 아무에게나 다가가 가까워졌다 낭패를 보지 말고 여유를 갖자 타이른다.

그러나 당장 학교에서 매일 8시간씩 보내야 하는 아이들에게 나의 충고는 제대로 들리질 않는다.

개학 첫 일주일. 하루 종일 레이더망을 가동해 얻은 정보들을 조잘대며 전달하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오랜 친구 J가 떠올랐다.


J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국민학교 교실에서였다. 책 읽기를 너무 좋아했던 나는, 학교에도 책을 가지고 가 틈만 나면 읽어댔다.

가끔은 쉬는 시간에 읽던 책을 덮지 못하고 교과서를 책상에 세우고 책상 아래에 소설책을 놓고 읽곤 했다.

책장을 정신없이 넘기다 선생님께 걸리고는 어떻게 아셨지 어리둥절해하며 혼난 적도 여러 번이었다.

교단 위 선생님에게 내 모습이 빤히 보인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어느 날, 종이 쳐 수업이 시작했는데도 나는 어김없이 책을 읽는 중이었다.

선생님은 “딴짓하는 친구는 지금 정리하면 선생님이 그냥 넘어갈게.”라고 하셨다.

책을 잘 숨겨서 읽고 있다고 판단한 나는 책을 바로 덮지 않고 다시 읽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는데 J가 손을 번쩍 들었다.

“선생님, C가 다른 책 펴서 읽고 있는데요.” 평소에 회장, 부회장을 번갈아 도맡아 했던 J가 정말 당찬 목소리로 외쳤다.

친한 줄 알았는데 배신하다니. J가 얼마나 얄밉던지 요즘도 가끔 J에게 너 정말 별로였다고 이야기하곤 한다.

국민학교, 중학교는 같이 다녔지만 고등학교 때 우리는 다른 학교로 진학했다.

그래도 둘 다 성당을 다녔기 때문에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은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 나는 서울로, J는 대전에서 대학을 갔다.

J가 서울에 오기도 하고 내가 대전에 가기도 해서 연락은 끊이지 않았다. 약간의 거리가 오히려 관계를 편안하게 해주는 부분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 J는 마침내 서울에서 취직을 했고, 그 회사가 내 회사와 가까워서 우리는 20대의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비슷한 직업을 가진 부모님, 크게 다르지 않았던 가정환경과 성장배경, 국민학교 때부터 함께 해온 시간은 J와 내가 서로를 편안하고 익숙하게 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서울이라는 타향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했다. 한 해 차이로 결혼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았다.

결혼 후, 다른 도시에 살았지만, 아이들이 동갑이라 육아의 고통과 기쁨도, 결혼 생활 이야기도 끊이지 않고 나눌 수 있었다.

인연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J는 국민학교 이후 내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로 손꼽힌다.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 들었을 때 이렇게나 적절한 표현이 있을까 싶었다.

대학교 때 친구, 회사 시절 동료, 또 결혼후 잠시 거주했던 도시에서 알던 사람들, 한때 함께 했던 독서 모임으로 평생 인연으로 이어질 줄 알았던 이들.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 알던 아이 친구 엄마들.

절대 멀어지지 않을 줄 알았던 많은 인연들이, 마치 닿았던 적 없었던 관계들처럼 뚝 끊겨버렸다.


인간관계에도 유통 기간이 있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에게는 어린 시절 친구에 연연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정작 나는 시절 인연을 훌쩍 넘어선 평생 인연의 J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던 거다.

많은 사람들이 내 인생에 문을 두드린다.

문을 열어주고 싶지 않았지만 열어주고 보니 괜찮은 사람, 대답도 하기 전에 가버리는 사람, 문을 열어줬지만 들어오지 않고 가버리는 사람.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하고 기다리면, J와 같은 선물이 찾아와 오랜 시간 내 곁을 지킬 수도 있겠다고, 그래서 기쁨은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에게도 많은 순간순간의 시절 인연도 있겠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 보석 같은 평생 인연도 있을 수 있다고 그러니 잘 찾아보라고 이야기해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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