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좋아하는가
Hello, English!
“엄마, 애들이 영어로 자기들끼리만 말해!” 하교 후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입을 삐죽이며 엄마에게 투덜거렸다. 국민학교 때였다. 언제부터인가 영어로 말하는 무리가 생겨났다. 다소 생소한 제스처와 조금은 높은 톤으로 낯선 억양의 언어로 말하는 그 아이들이 부러웠다. 꼬부랑 글씨가 가득 차 있는 페이지를 눈으로 읽어 내려가다 망설임 없이 책장을 넘기는 그 아이들은 어린 나의 눈에도 참 ‘있어’ 보였다. 나는 왜 알아들을 수 없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영어 책은 더 재밌나? 그들만의 세상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 세계에 속하고 싶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아빠가 이직하시며 이사한 보금자리 근처에 있던 유일한 국민학교였다. 옆집도, 아랫집도, 앞동 친구네도, 뒷동 친구네도, 소속 연구소는 달랐지만 대부분은 부모 중 한 분이 연구원이었다. 겉으로는 특별한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그 안에서도 ‘국내파’와 ‘해외파’라는 출신 학교의 차이가 존재했다. 아빠는 국내 대학 출신 연구원이었다. 우리 집은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들을 위해 자주 책을 선물해 주시는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러나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학위를 받은 집들은 달랐다. 미국에서 태어나 시민권이 있는 친구들도 있었고, 그런 집에서는 그 아이의 영어를 사수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엄마도 느끼는 바가 있으셨는지 영어 선생님을 찾아 수업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선생님네 집 작은 방에서 시작한 수업은 내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영어를 원어민처럼 하던 아이들을 향한 부러움과 영어에 대한 흥미 덕분에 수업 시간은 지루했던 적이 없었다. 쉬운 동요도 배우고 디즈니 동화들도 읽으며 나는 영어와 점점 친해졌다. 몇 년 만에 선생님네 작은 아파트는 근처에서 가장 새로 지은 멋진 아파트로 바뀌었고, 두 세 단어로 된 문장도 제대로 말할 줄 몰랐던 나는 <ET>, <Mrs. Doubtfire>과 같은 가족 영화를 이해할 정도의 수준까지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인생의 첫 성취감을 느끼다
영어 수업을 시작한 이후, 하루의 일정 시간은 늘 영어 공부가 차지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었다. 그저 배움과 새로운 깨달음이 좋았다. 필기체로 알파벳을 따라 쓰며 나만의 암호를 발견한 듯 기뻤다. ‘그들의 대화’가 어느 순간 귀에 쏙쏙 박히기 시작했다. 팝송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를 수 있었고 하이틴 로맨스 원서를 읽으며 짜릿함도 느꼈다. 어떤 날은 단어를 외웠고, 어떤 날은 같은 문장을 듣고 또 들으며 단어들을 적어 내려가며 그 뜻을 헤아렸다. 좋아하는 문장들을 외웠고 내 것으로 만들었다. 반복된 시간들은 오롯이 내 안에 쌓였다.
“우리랑 영어 연극 대회 나가보지 않을래?” “진짜? 내가 같이 나가도 돼?” 친구가 5명이 한 팀이 되어 나가는 영어 연극 대회에 나가자고 했다. 친구에게 내 영어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뿌듯했다. 우리 다섯은 대본도 쓰고 영어 대사도 열심히 연습했다. 지역 예선에서 1등을 했던 날, 무대 위에서 우리를 비추던 밝은 조명과 쿵쾅거리던 심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각 지역 우승자들은 서울에서 다시 한번 실력을 겨뤘고 우리 팀은 다시 한번 1등을 했다. 대회의 부상은 9박 10일의 미국 여행이었다. 인솔자 선생님이 동행하기는 했지만 친구들과의 미국 여행은 매 순간이 새롭고 벅찬 경험이었다. 내 안에서 조용히 찰랑이던 영어는 미국에서 진짜 언어가 되어 마구 넘실댔다.
영어는 어떤 일을 꾸준하게 노력한다면 잘할 수 있다는 믿음과 성취감을 처음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좋은 결과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어린 나이였음에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치은이 취은 리가 될 때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여전했던 영어를 향한 열정 덕분에 외국어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독해, 청해, 작문, 회화, 기초, 심화 등 언어에 세분화된 수업으로 가득했던 고등학교 생활은 꽤나 즐거웠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대학 원서를 쓰며 언어 전공 대신 다양한 선택을 했지만, 나는 기꺼이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머물기로 결정했다. 대학 생활을 하면서 나는 영어에 더 욕심이 생겼고 미국으로 1년 동안 어학 연수를 떠났다.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닐 텐데 영어를 사용하는 ‘지은 리’는 국어를 쓰는 이지은과는 분명 달랐다. 낯선 사람과도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가벼운 대화 정도는 거리낌 없이 나누는 내가 있었다. 마치 밝고 사교적인 또 다른 내가 어디선가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내가 어학연수를 했던 대학교에서는 언어 교환 친구를 맺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당시에는 일어를 배우고 싶은 미국인은 많았던 반면, 한국어를 원하는 원어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스몰 토크’와 농담으로 무장한 씩씩한 지은 리는, 재미 교포 언니에게 다가가 적극적인 질문과 대화 끝에 그 언니를 언어 교환 친구로 쟁취해냈다. 연수 기간 동안 특별한 일이 없으면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언어를 교환했다. 지은 리는 언니가 초대하는 어떤 곳이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갔고, 언니는 종종 지인인들과 내가 함께께 여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연수에서 돌아와 복학은 했지만 뚜렷하게 일하고 싶은 분야가 없었다. 막연히 영어를 쓰는 외국인 회사에 취직하고 싶다는 생각만 했을 뿐이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여름 방학에 교내 산학 협력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감사하게도 원하던 외국인 회사에서 인턴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주로 유럽의 회사를 상대하는 업무가 많았고 외국인 엔지니어들도 함께 일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지은보다는 지은 리로 지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you’라는 단어는 충분히 존대의 의미를 담고 있음에도, 한국어의 높임말처럼 나를 작게 만들지 않았다. 업무 지시를 받았을 때 “왜 그렇게 해야 하나요?”라는 말은 차마 안 나왔지만, “Why do you think so? Would you explain it to me?”라는 질문은 주저저 없이 할 수 있었다.
모두가 “예”라고 대답할 때 홀로 “아니오”라며 다른 의견을 표현할 용기는 없었지만, 영어로 “I don’t think so.”라고 표현하는 것은 이상하게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영어로는 나보다 연장자나 직급이 높은 사람에게도 주저 없이 질문하고 의견을 말할 수 있었고, 그 당당함은 영어를 쓰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모습이었다. 이런 태도가 회사의 분위기와 맞았는지 나는 정직원이 되었고, 결혼 후 퇴직 전까지 그 회사에서 일할 수 있었다.
영어를 통해 내 안의 또 다른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다름은 국어를 쓰는 이지은에게는 없는 지은 리만의 색을 더해 삶의 스펙트럼을 넓혀 주었다.
재미를 느끼다
영어를 잘 하게 되면서 보람도 느꼈고 나의 다른 면을 찾은 것도 좋았지만, 35년이 넘어가도록 영어를 가까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재미였다. <Eat, Pray, Love>라는 책 속 주인공 리즈는 현실의 문제를 뒤로 하고 이탈리아에 몇 달 간 살기 위해 떠난다. 열심히 이탈리아어를 배우는 리즈에게 “아무 쓸데도 없는 이탈리아어는 왜 배우려고 해?”하고 누군가 물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은 오직 필요만을 위해 존재하는 거야?”라고 리즈가 되묻는 부분을 읽으며 나는 형광펜으로 밑줄을 쭉 그었다. 리즈는 자신의 오래된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두 비워내고 그 곳에 대신 반짝이는 아름다운 이탈리아 단어들로 채우고 싶다는 고백을 한다. 나에게 영어는 리즈의 이탈리아어다. 영어가 여러모로 조금 더 실용적이긴 하지만, 그 본질은 같다. 원서를 읽으며 언제 쓸지 모를 유의어나 반의어를 정리하고, 마음에 드는 표현을 적어두는 것. 나는 그 행위 자체로 행복하다.
영어로 여러 나라의 다양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나에게는 큰 재미를 준다. 언젠가 샌프란시스코 스타벅스에서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꾀죄죄한 더벅머리 백인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며 우리 일행에게 다가왔다. 동양인 여행객에게 구걸하러 온 노숙인인가 싶어 긴장했을 참이었다. 할아버지는 우리 일행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자 자신이 6.25 참전용사 였다며 말을 이어갔다. 영어를 할 수 없었다면 그 분을 그저 노숙인으로 여겼을 수도 있었다. 그 분의 무용담을 들으며 나와 일행은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커피 한 잔도 대접할 수 있었다.
원서를 읽음으로써 번역을 통하지 않고도 작가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닿을 것 같다고 느꼈다. 새로운 어휘를 익히고 원문 그대로의 글을 읽으며 즐거웠다. 영어라는 매개체가 아니었다면 절대 소통할 수 없었을 사람들과 삶의 한 순간을 나눌 수 있어 재밌고 신기했다.
Thank you, English!
회사를 다니면서 6개월 동안 주말마다 TESOL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 외국인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 수업을 들어 두었다. 아이들도 좋아하고 영어도 좋아하니, 언젠가 기회가 생겼을 때 준비가 되어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결혼 후 남편을 따라 다른 도시로 이사했고 다니던 회사에서 퇴사해야 했다. 새로운 도시에서는 이전 경력으로 일할 만한 회사를 찾을 수 없어 한동안 쉬었다. 결국 준비해 왔던 영어 강사에 도전했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원어민 교사들과 어울리는 일도 적성에 꽤 잘 맞았다.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경력이 단절되기 전까지 나는 강사 생활에 충실히 임했다.
육아 중에도 틈틈이 원서를 읽거나 자막 없이 미국 드라마를 시청하며 영어 감각을 유지하고자 애썼다. 예전에 비해 영어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영어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고 여전히 함께였다. 사춘기가 온 딸들과 매일 전쟁을 치르며 엄마가 아닌 ‘이지은’으로 다시 일어서고 싶을 때에도 나를 일으켜 세워준 것은 영어였다. 작년 5월, 나는 강사 일에 다시 지원했고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순도 100%의 마음으로 좋아했던 영어는 어느 순간 인생의 한 부분이 되어 내 장점이자 능력이 되었다. 어린 시절 영어로만 이야기하던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나는, 꾸준한 노력과 경험을 통해 영어를 내 것으로 만들었다. 영어는 단순한 언어 그 이상으로 나에게 자신감과 성취감을 주었고, 새로운 사람들과 세상을 연결해주는 다리가 되었다. 가끔씩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의 삶에 기웃거리거나 원서를 뒤적이며 재미를 느낄 수 있어 행복하다. 내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다시 한번 자리매김할 수 있는 발판이 된 것이 영어라는 사실에도 감사하다. 영어는 지금까지도, 앞으로 남은 내 인생 여정에서도, 든든한 평생 친구로 나의 옆자리에 늘 함께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