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으로 오는 길
“대전에서 계속 살 것이냐, 세종으로 갈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대전에서 살던 2015년, 큰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한 해 앞둔 우리 부부는 큰 고민에 빠졌다. 아이들에게 안정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대전에 머무르고 싶었다. 하지만 나와 달리, 남편은 하루라도 빨리 신도시로 이사하고 싶어 했다.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어릴 때 움직이는 것이, 주거와 육아 환경 면에서나 경제적 면으로나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나는 쉽게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아이들도 나도 이제야 가까운 친구들도 생겼고 동네에 익숙해졌건만, 정든 사람들과 동네를 뒤로 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남편 역시 포기를 몰랐다. 몇 달에 걸쳐 주말이면 세종의 호수공원과 여러 아파트 단지, 단지 내 놀이터로 우리를 이끌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신도시의 모든 장소들은 나와 아이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우리는 남편이 눈여겨봐 두었던 세종의 한 단지로 이사를 결정했다.
이사 갈 아파트는 완공 후 우리가 첫 거주자였기에, 일단 이삿날이 정해지자 이사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결혼 10년 차라 가구가 낡았고 또 큰 아이가 곧 초등학생이 된다는 핑계로 새 집에서 쓸 가구를 검색하고 주문하며 나는 조금씩 설렜다.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갈대와도 같은지. 대전에 남고 싶던 마음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신혼살림을 준비하듯 설레는 마음으로 이사 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남편과 빈 집에 가 쓸고 닦았다. 가구 배치를 위해 길이를 재고 자리를 고민하면서 우리의 보금자리가 될 공간이 더 좋아졌고 기대감 또한 커졌다. 양가 부모님들은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집을 보고도 환하고 좋다며 기뻐하셨다. 우리의 선택이 어른들에게도 인정을 받은 것 같았다. 어른들 도움 없이 우리가 찾고 결정한 첫 집이었기에 우리 부부는 진짜 어른이 된 듯 내심 더 만족스러웠다.
기분 좋게 이사를 준비했지만 한 번씩 사기가 꺾이기도 했다. 당시 영어 강사로 일하던 나는 세종에서 대전까지의 출퇴근이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아, 그만둔다고 미리 말씀드리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던 원장님은 ‘세종, 다들 이사 들어갔다가 되돌아 나오던데 정말 괜찮겠어?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가서 애들이랑 어떻게 지내려고.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마음 한 구석에 애써 눌러 두었던 염려를 다른 이의 입을 통해 직접 듣고 나니 부풀었던 마음은 금세 납작해졌다. 사실 원장님만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과연 세종시에 미래가 있겠냐며 그 앞날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 역시도 그런 불확실함이 염려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이제와 이사를 없었던 일로 할 수도 없었다. 남편에게는 속상한 내색도 못한 채, 신나는 마음과 걱정으로 쪼그라든 마음 사이를 하루에도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며 계속해서 이사준비를 해 나갔다.
대전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잠들기 전 아이들과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데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나는 새 집도 좋지만, 친구 집도 가깝고 유치원도 가까운 지금 우리 집도 좋아요. 여기 좀 더 살면 안 돼요?” 설렘 반, 두려움 반인 내 마음을 마치 아이에게 들키기라도 한 것 같았다. 울컥한 나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세종으로 이사를 오긴 했지만, 우리의 생활 터전은 한동안 대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세종에 아무것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뭔가 있다고 할 수도 없었다. 쇼핑을 하고 싶어도, 병원 진료를 받거나, 공연을 보려고 해도, 그 시절 세종에서는 쉽지 않았다. 어디를 가도 ‘우리 동네’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주변은 휑하게 낯설기만 했다. 세종에서 대전까지는 가까운 편이라면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편도 30분 거리였지만, 왕복 1시간의 물리적 거리는 이제 더 이상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게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대전 또한 ‘우리 동네’가 아니라는 느낌에 심리적 거리마저 점점 벌어졌다. 그러던 차에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새로운 유치원으로 옮기며 우리의 인간관계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아이들이야 학교에서, 원에서 자연스럽게 새 친구를 만나기 시작했지만, 나는 섣불리 아무와 나 관계를 맺고 싶지 않았다. 강사로 근무한 지는 채 2년이 안 되었지만, 육아와 일을 하며 쌓였던 피로도 풀 겸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 보리라 결심했던 차였다. 나는 주로 책을 읽거나 취미로 즐기던 자수를 하며, 단지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곁을 지켰다. “어머, 이거 수놓으시는 거예요?” “아, 네, 맞아요.” 이 짧은 대화와 말을 건넨 얼굴을 기억한 이유는, 내가 유난히도 짧고 냉랭하게 답을 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단지 내 수영장에서 아이들을 챙기다 다시 마주친 그이는 동갑이라는 나의 말에 “반갑다, 친구야!”라고 악수를 청했다. TV 프로그램 제목을 연상케 하는 한 문장에 난 웃음보가 터졌다. 그 유머러스한 한 마디는 고독을 즐기려던 내 마음을 단숨에 무장해제 시켰다. 그날 이후 우리는 가까워졌고 알음알음 인간관계를 넓혀 십 년째 슬기로운 동네 친구 생활을 하고 있다.
세종에서 처음 맞이한 여름, 녹음이 푸르르게 우거져야 하는 한여름에도 어쩐지 여리여리 초라하던 꼬맹이 나무들은 조금씩 무성해지고 키가 자랐다. 가지마다 ‘에계~ 이게 뭐야~’하는 말이 절로 나오도록 가냘프게 피던 꽃들도 이제는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며 꽤 탐스럽게 피어난다. 어디를 가든 엄마 아빠를 대동해야 했던 꼬마 숙녀들도, 이제는 시선이 얼추 맞을 만큼 훌쩍 자랐다.
오래된 도시들과 비교하면 여전히 신생아 수준의 세종이지만, 이런 세종도 분명 자라고 있다. 자리를 잡아가는 이 도시 안에서 우리 가족도, 동네 친구들도 나름의 뿌리를 내리며 함께 성숙해 가고 있었다. 처음엔 눈 닿는 곳마다 낯선 장소와 모르는 사람들뿐이었지만, 이제는 걷다 보면 익숙한 가게들이 제법 보이고, 종종 아는 얼굴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좋아하는 음식점과 머무르고 싶은 장소들이 생기고, 그곳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보낸 시간이 차곡차곡 쌓여 간다. 마음 둘 곳 없어 쓸쓸하던 세종이,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익어가며 진짜 ‘우리 동네’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