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입은 도시, 세종

세종, 보물찾기

by 김현정

황무지에서 고향으로


398,628명.


대도시라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고, 소도시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인구. 약 40만 명. 짐작하다시피, 세종시 인구(2025년 5월 기준)다. 2025년 목표 인구였던 50만 명에서 대략 10만 명쯤 부족한 숫자다. 다소 아쉽긴 하다. 그러나, 설계 당시 도시 계획에 포함돼 있었던 일부 기관이 아직 세종에 내려오지 않은 걸 생각하면 오히려 목표를 초과 달성한 셈인지도 모른다.


도시가 출범한 2012년만 하더라도 세종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닌 곳이었다. 지리적으로만 따진다면 지금의 세종이 있는 그 자리 어딘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있겠지만, ‘세종’이라는 지명은 어디까지나 옛날의 연기군 일부, 공주시 일부, 청원군 일부가 더해져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국민공모를 통해 선정된 새 이름 세종.


세종시는 2012년에 출범했다.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닌 세종으로 내려갔다. 우리 부부는 충청도 일대를 통틀어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어렸을 때, 천안 독립기념관, 대전 엑스포, 충주호, 속리산 같은 충청도의 명소들을 둘러본 기억은 있었지만 해묵은 기억까지 모두 뒤져봐도 충청도와 관련된 얼굴은 한참 전에 스쳐 지나간 대학 동창들 뿐이었다.


그야말로 ‘산 설고 물 선’ 곳에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미래를 쉽사리 그려볼 수도 없었다. 텅 빈 백지를 채우는 게 원래 제일 어려운 법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각오는 돼 있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완벽한 타향살이를 어떻게든 즐겁게, 웬만하면 웃으며 견뎌보자는 게 내 각오였다. 정부청사 이전으로 갑작스레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세종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남편을 앞에 두고 많이 고민했다. 그러나, 평생 주말부부를 하는 것도, 남편이 서울에서 매일 출퇴근을 하는 것도 내키지 않아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함께 내려가 보기로 했다.


세종은 정말이지 누구의 고향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철저한 외지인이었지만, 세종은 꼭 나 같은 외지인으로 넘쳐났다. 세종시의 관문 역할을 하는 첫마을에 모여든 외지인들은 서로에게 곁을 내어주며 세종의 품에 안겼다. 누구의 고향도 아니지만, 그곳을 찾은 모든 외지인에게 삶의 터전을 공평하게 한 자락씩 내어주었던 땅. 그 너른 품 덕에 세종은 ‘그 누구의 고향도 아닌 땅’에서 ‘모두의 고향’이 되어가고 있다.



한글의 고향,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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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번째 고향이 되어준 세종은 40만 명이 되는 시민을 품고도 더 내어줄 품이 있는 도시다. 세종이 두 팔 벌려 환영하며 끌어안은 것 중 무엇보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한글이다. 한글은 이집트 상형문자나 중국 갑골문과는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생겨난 몇 안 되는 문자 중 하나다. 한글 사용 방법을 설명하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문자다.


안타깝게도, 한글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는 어딘가 이중적인 데가 있다. 2012년, 남태평양 솔로몬제도의 과달카날주와 말라이타주가 한글을 표기문자로 도입했다. 2019년에는 인도네시아 찌아찌아족이 고유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한글을 공식 문자로 채택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해준다는 뉴스가 들려오면 괜히 우쭐하지만 막상 한국 사람들끼리 대화할 때는 너도나도 뽐내듯 갖은 꼬부라진 말을 입에 올리기에 바쁘다.


홍대, 성수동, 강남 등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심 거리는 외국어로 넘쳐난다. 한국어가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은 간판이 떡하니 걸린 식당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오직 영어로만 주문을 받는 가게도 등장했다. 한글이 우수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외국어를 써야 폼이 난다고 믿는 걸까?


그게 끝이 아니다. 혀끝에 자꾸만 외국어를 올리는 사람들의 눈이 닿는 곳에는 어디나 외국어 천지다. 아파트 외벽을 올려다보면 ‘리젠시’니 ‘리첸시아’니 하는 의미 없는 외국어들이 잔뜩 늘어서 있다. 옆 아파트보다 딱 한 단어만 더 붙이면 집값이 조금 더 올라갈 거라고 믿는 건지 다들 뜻도 모를 외국어를 쭉쭉 늘려 쓰는 데 열을 올린다.


사람들이 경쟁하듯 그럴듯한 외국어를 찾아 헤매는 새 안타깝게도 한글은 설 자리를 잃은 떠돌이 신세가 됐다. 그런 한글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곳이 바로 세종이다. 조선의 4대 임금이자 한글을 창제한 성군의 이름을 딴 도시 세종. 그 깊은 품에 한글이 다시 안길 수 있는 길을 연 것이 세종시다.



세종, 그곳에서 오래된 미래를 만나다

2024년, 세종은 한글문화도시로 지정됐다. 한글문화수도로 거듭나겠다는 세종시의 원대한 포부에 추진력이 더해지는 순간이었다.


“세종대왕의 이름을 땄다는 거 말고 세종이 도대체 한글과 무슨 상관이지?”라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종이 한글 전용 도시가 된 건 갑작스러운 일도, 우연도 아니다. 세종은 공식 출범할 때부터 신도시 내의 법정동, 마을, 도로, 학교, 공원, 교량 등 약 1,000여 곳에 한글 이름을 부여했다. 실제로 세종시의 여러 동 명칭에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유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내가 세종시로 이사해 처음 터를 잡았던 곳은 ‘첫마을’이다. 아주 직관적인 이름이다. 누가 봐도 세종의 첫 번째 마을이라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세종정부청사가 있는 곳의 동 이름은 ‘어질고 마음이 너그럽고 착하다’라는 의미를 담은 ‘어진동’이다. 어진동의 마을명은 ‘한뜰마을’이다. ‘커다란 뜰’이라는 뜻이다. 정부의 역할이 원래 어질고 너른 마음으로 국민을 품는 것일 테니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싶다.


image.png 세종시 지명(출처: 세종시청)


세종시는 도시 전체에 한글의 정신을 새겨넣기 위한 노력을 이어나가고 있다. 세종의 한글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구조물은 금강을 둥그렇게 잇는 이응다리다. 다리의 목적은 대개 나뉘어있는 두 땅을 최대한 효율적인 방식으로 잇는 것이다. 금강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뉜 세종을 연결하는 이응다리는 이름처럼 ‘ㅇ’ 모양을 띠고 있다.


image.png 금강보행교 (출처: 시청 홍보자료)


세종 시민들은 ‘금강보행교’라는 공식 명칭보다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한글 이름, ‘이응다리’를 선호한다. 이응다리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먼저, 이응다리의 길이는 1446미터이다. 이 숫자를 듣고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 이번에도 역시 세종대왕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1446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응다리의 둘레를 1446m로 정한 것이다.


이응다리의 두 번째 특징은 특이한 복층 구조다. 이층 버스, 이층 침대, 이층집. 무엇이든 이층이 될 수 있다면 다리라고 이층이 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효율적인 이동을 원한다면 자전거를 타고 하부층을 따라 신나게 달려보자. 그러나 이응다리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보행자 전용층인 상부층이 제격이다. 이응다리 상부층은 비효율의 극치다. 나무 조형물에 줄줄이 매달린 금속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놀이공간, 한글로 쓰인 글씨들이 줄줄이 매달려 있는 한글 나무, 가볍게 누워 한가로이 불어오는 금강의 바람을 즐길 수 있는 해먹. 다리 위에 빼곡히 자리한 조형물과 설치물을 즐기고, 잠깐 멈춰 서서 탁 트인 강물을 바라보다 보면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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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다리에서 바라본 한두리 대교.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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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성동_야경.jpg
이응다리_야경.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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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전경(출처: 직접 촬영)


세종은 여전히 미완성의 도시다. 해마다 새로운 길이 생기고, 그 길에 새로운 이름이 붙고, 새로운 사람들이 터를 잡는다. 그러나 미완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다양한 색을 품은, 좀 더 다채로운 도시로 나아갈 가능성을 품은 곳이 바로 세종이다. 가재, 한뜰, 나릿재, 범지기, 해들, 사오리, 한두리. 세종 곳곳에 숨겨진 보물 같은 우리말이 이 도시를 좀 더 멋진 곳으로 인도하는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만 같다.


기억해 두면 좋을 말

나릿재: 냇가에 있는 성
범지기: 범이 누워 있는 모습
해들: 해가 따스하게 드는 모습
사오리: 발돋움의 옛말
한두리: ‘크다’는 뜻의 ‘한’과 ‘원’을 뜻하는 ‘두리’를 더한 합성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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