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크레딧
깜깜했던 극장에 조명이 들어오며 영화 상영이 끝났음을 알려줬다. 관객들은 하나둘씩 일어나 자리를 떠나기 바빴다. 직원들은 출입문을 붙들고 우리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동안 엉덩이를 뗄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아직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가기 전이기 때문이었다.
감독-주연배우-제작자 순으로 시작되는 엔딩 크레딧은 마지막으로 ‘감사한 분들’의 이름을 줄줄이 적어주며 끝이 난다. 스크린의 가로 사이즈는 18m나 되는데, 영화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은 10포인트 정도 되는 크기로 몇 초 새에 지나가 버린다. 그렇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내 이름 석 자 ‘유 지은’만큼은 누군가 나만을 위해 볼드체로 설정해준 것마냥 선명하게 보인다. 그리고 그 때만큼은 나는 확실하게 존재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는다.
“아무래도 제작팀은 그만 둬야 겠어.”
“그럼 인제 와서 뭐하게?”
“부자 돼서 영화에 투자나 하게. 그래야 이름 맨 앞에 나오잖아. 누나도 퇴사하고 같이 사업이나 하자.”
“얼씨구.”
고생은 스탭들이 다하는데 사람들이 알아주는 건 배우들뿐이라며 지훈이 툴툴거렸다. 그나마 투자자들은 영화가 시작하는 오프닝 시퀀스에 떡하니 이름을 적어주기라도 하니 그거라도 해야겠다면서 지훈의 투정이 이어졌다. 그럼 잘생겨서 배우 하지 그랬냐는 나의 말에 지훈의 입이 삐죽 튀어 나왔다. 이런저런 농담 따먹기를 하다 우리는 상영관 뒤쪽 스낵박스에 자연스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고로 영화는 막을 내리고 나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우리 지론에 맞게 본격적으로 자세를 잡고 토론을 시작하려는데 맞은 편에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녀 한 쌍이 주변을 의식하며 지나가는 걸 발견했다. 용산 아이파크몰은 워낙 크고 심야 시간엔 사람이 없어서 저런 유명인들을 목격하는 건 꽤 나 흔한 일이다. 모른 척 해 주는 게 예의일 것 같아 눈길을 거두려는데, 내 옆에 있어야 할 지훈이 사라졌다.
어느새 그들에게 넉살 좋게 말을 붙이고 있는 지훈이 보였다. 지훈은 그들과 짧지 않은 대화를 나눈 후 흡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남자는 올여름에 독립영화제를 휩쓴 신인 감독 ‘이상연’이었고, 여자는 이상연 감독의 뮤즈라 불리는 신인 배우 ‘주보나’였다. 지훈은 보자마자 영화인들인 것 같은 촉이 와서 말을 걸어봤다며 잔뜩 들떠있었다. 나는 그저 연예인 커플인 줄 알았는데, 감독인 걸 어떻게 알아봤냐는 나의 물음에 지훈은 ‘남자 머리를 봐. 장발이잖아’라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면 영화감독들 중에는, 특히 막 입봉을 한 남자 감독들은 무슨 정해진 코스인 마냥 머리를 기르고 볶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미 사라져버린 이상연 감독의 뒷모습을 다시 떠올려 봤다.
모자를 눌러 썼지만 감출 수 없이 삐죽 튀어나왔던 긴 파마머리. 나는 단 하루도 울지 않고 잠들 수 없었던 그 시절에 내 옆에 있었던 누군가를 잠시 떠올렸다. 갈색의 긴 머리를 형용할 수 없이 이상하게 볶아놨던 그렇지만 그게 참 잘 어울렸던 사람.
“그러고 보니까 얼마 전에 졸업한 그 화석 선배 졸업작품에서 누나 나온 거 봤어.”
“아 그래?”
“누나 연기 잘 하더라.”
“난 하면 뭐든지 중간은 해.”
“아니 진짜로. 예전에 연기 배운 적 있어?”
진심인듯한 지훈의 물음에 나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아까 지훈의 입에서 주보나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 무언가 찜찜했던 건 기분 탓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그 길을, 다른 누군가가 걸어가는 것을 보는 것조차 몸서리칠 정도로 싫은 시절이 있었다. 물론 요즘도 썩 내키지는 않는다. 주보나는 요즘 떠오르는 루키였고, 모두가 동의하는 그녀의 연기력에 늘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건 나뿐이었다. 물론 내가 연기를 계속했더라도, 주보나만큼 잘 됐으리란 보장은 없었지만 말이다.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집으로 가는 중에 압구정 쪽을 지나쳤다. 광교에 살고 있는 내가 지금은 압구정에 올 일이 전혀 없지만, 10여 년쯤 내가 가장 열렬하게 청춘을 바쳤던 곳이 바로 압구정이었다. 학교에서보다 나는 이곳에서 꿈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하루의 절반을 보냈다.
***
열여덟의 겨울 방학, 자습을 하고 있는 친구들을 뒤로 한 채, 나는 교실을 벗어났다. 앞머리를 싹 까고, 다 늘어난 체육복을 입고 있는 예비 고 삼 친구들과 달리 나는 몸에 딱 붙는 무용복 위에 패딩을 걸치고 선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고삼의 전유물인 수능특강 대신, 대본이 가득 담긴 빨간 파일을 대학생 마냥 가슴팍에 대고. 학원에 도착하면, 배우는 몸과 얼굴로 표현하는 직업이라고 매일 귀에 딱지가 앉게 소리를 들었다. 특히 연극영화과 입시생들은 특기로 고난도 아크로바틱이나 현대무용을 하기 때문에 1g이라도 더 깡 말려야 했다. 수업 전 다 같이 전자 체중계에 올라가서 약속된 몸무게로 통과된 자만이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봄이 되기 전까지 학원에선 신체훈련만이 이어졌다. 나의 온몸에는 열띤 훈련이었음을 증명하듯 영광의 상처들이 새겨졌다. 5월부터는 본격적인 수업이 이루어졌다. 나는 학원에 가장 연장자인 스물셋 사수생 은비 언니와 한 팀이 되었다.
우리에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이 주어졌다. 나름 학원의 에이스였던 은비 언니와 나에게 제법 어려운 작품을 준 것이다. 언니는 연기를 잘했고, 나는 내 입으로 말하긴 조금 민망하나 비주얼이 꽤 좋은 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길거리 캐스팅을 종종 받다가 연예인을 해보면 어떨까 싶어서 지금의 학원에 상담을 오게 되었다. 원장님은 나를 보자마자 넌 타고난 배우의 아우라 같은 것이 있다며, 바로 자신이 직접 강의를 하는 전담반에 넣어줬다. 나는 알게 모르게 선생님들의 편애를 받으며 연기를 시작했다.
언니는 ‘블라디미르’를 나는 ‘에스트라공’ 맡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극 중 내내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극을 이해했는지 제법 역할을 소화를 하는 언니에 비해, 나는 전혀 따라가질 못했다. 언니는 그런 내가 신경 쓰였는지 그 날 명동예술극장에 데려가 ‘고도를 기다리며’를 보여줬다.
“어때, 이해가 좀 가?”
“그래서 고도는 왜 안 오는 건데?”
“그걸 기다리는 게 이 극의 주제야. 모르겠으면 다른 작품으로 바꾸자.”
고된 수험생 생활에 살짝 예민해졌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언니의 말을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했을 만큼 그 당시 내 성격이 건방졌던 것이었을까. 아무튼 그때, 언니의 말이 곱게 들리지 않았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언니를 괜히 건드려봤다.
“근데 사수를 하는 건 어떤 기분이야?”
“노래방에서 1분 남겨 놓고 선곡하는 기분이야.”
언니의 표정엔 미동도 없었다. 열아홉의 나에게, 평정을 유지하는 스물셋 언니의 표정에서 상당한 연륜이 느껴졌다. 우리는 다시 학원으로 돌아가 연습을 강행했다. 묘하게 불편해진 우리 둘의 분위기에 난 연습이 끝난 후, 재빨리 학원을 먼저 빠져나왔다. 그리고 압구정 국민은행 앞에서 집으로 가는 광역버스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버스가 오지 않고, 날은 이미 어둑하고 지하철을 타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연습을 마친 언니가 내게 다가왔다.
“그 버스 고도야.”
“무슨 소리야?”
“안 온다고. 6800번은 배차 간격이 45분이야.”
결국, 언니랑 지하철을 타고 집에 오면서 나는 언니에게 아까의 일을 사과했다. 은비 언니는 정말 쿨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도리어 내게 먼저 사과해줘서 고맙다며 자신이 해석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차분히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점으로 된 목표를 가지고 긴 선을 그어가잖아. 근데 실제로 점은 찰나라서 인생이 될 수 없어. 그 과정인 선만이 존재할 뿐이지. 그러니까 고도를 기다린다는 건 너무 허무한 일이야. 이해가 가?”
“그래서 고도는 왜 안 오는 건데?”
애석하게도 언니의 말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니는 아직 내가 뭘 제대로 기다려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라며 날 토닥였다. 기다림이란 무엇일까. 지금의 언니와 나에겐 누구나 들으면 부러워할 만한 학교에 합격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합격을 기다리는 건 왜 허무한 일일까. 합격만 한다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답답함을 느낀 나는 결국 오지 않은 고도와 퇴근길의 끔찍한 지하철에 애꿎은 분노가 일었다.
***
내가 일하고 있는 제작사의 유일한 복지는 자율출근제이다. 나는 전날 늦잠의 여파로 12시까지 출근을 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지훈을 비롯한 다른 직원들은 점심을 먹으러 간 모양이 었다. 텅빈 사무실에서 혼자 커피를 한 잔 타와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제작을 맡게 된 이상연 감독의 신작 시놉시스를 한 번 더 훑고 있었다. 얼마 전 지훈과 이상연 감독이 영화관에서 서로의 명함과 번호를 교환한 게 이번 건의 계기가 된 것이다. 시나리오는 정말 충무로의 기대주답게 기가 막히는 내용이었다. 대표님이 지훈더러 복덩이라며 기뻐하며 좋아하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제 또다시 예산과 스케줄, 배우 캐스팅 등 영화 제작의 전반을 또 책임질 시간이 온 것 같았다. 얼마 남은 것 같지 않은 이 여유를 더 만끽 해야 겠다며 커피를 연신 홀짝거리는 데, 새 영화의 캐스팅 보드가 눈에 들어왔다. 주연배우 후보에 가장 1순위로 놓여있는 건 주보나였다.
나는 주보나에 대해 궁금해져 초록위키에 들어가 그녀의 프로필을 쭉 훑었다. 나이는 스물 여덟로 나와 동갑이었다. 기분이 괜히 이상했다. 이번엔 필모그래피 목록을 살펴보다 이보나의 단역 시절 사진을 보게 됐다. 지금의 얼굴과는 사뭇 다른 퉁퉁한 모습이었다. 스크롤을 쫙쫙 내려 학력 사항도 확인하니, 주보나는 뜬금없는 웬 애니메이션과 출신이었다. 뭔가 고까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어느덧 나는 주보나의 인터뷰까지 섭렵하고 있었다. ‘주보나 눈도장 제대로 찍다’ 라는 말이 헤드라인으로 뽑힌 기사를 클릭해 들어가 보니, 대충 주보나가 지난 작품을 통해 대중들에게 각인받을 받았고, 그런 그녀에겐 데뷔 전 남모를 힘든 시기가 있었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나는 너가 살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을 아느냐고 혼자 그녀에게 빈정대고 있었다. 한참을 이보나에 대해 검색하다 보니 어느덧 직원들이 사무실로 돌아왔다.
“보나씨가 캐스팅 1순위에요?”
“그럼요. 이상연의 뮤즈잖아요. 뭐 연기도 괜찮은 편이고.”
“연기가요? 발음이 줄줄 새던데.”
나의 발언에 사무실 사람들이 상당히 당황한 눈치였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난 부끄러운 게 뭔지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아침을 잘 못 먹어 속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급하게 화장실로 향했다. 서둘러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환한 화장실 조명 아래 거울 앞에 서 있는 내가 보였다. 거울 속의 나와 눈이 마주치자 나는 도망치듯 화장실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 된 후, 불을 끄고 깜깜한 화장실로 다시 들어왔다. 화장실 변기 칸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있으니 부끄러움이 또 밀려 들어왔다. 그러나 이미 뱉어 버린 말을 주워버릴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더 괴롭게 할 뿐이었다. 뻔뻔해지자.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 주보나씨에게 마음속으로 사과를 전했으나, 솔직히 그녀가 맘에 들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고, 입시가 한층 더 가까워졌다.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실기 시험을 대비해서 모두가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중이었다. 부족한 연기나 특기 연습에 매달리는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친구들은 학원과 연계된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가서 시술을 받기도 했다. 은비 언니 역시 다이어트에 강박이 상당히 심해 끼니를 전부 거르고 볶은 병아리콩으로 떼우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언니와 함께 준비했던 ‘고도를 기다리며’로 좋은 평가를 받은 이후, 연기에 대한 흥미와 열정이 상당히 잔뜩 고조된 상태였다. 외적으로 따로 관리할 게 없었던 나는 주어진 시간들을 오로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알아서 내게 받쳐주는 환경에 의해 묘한 우월감과 자신감에 생겼고, 그것들에 힘입어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수시합격을 했다. 여섯 군데 중에 두 군데나 붙었으며, 그중 더 좋은 학교를 선택했다. 그리고 은비 언니는 정시까지 갔지만, 결국 어떤 학교에도 붙지 못했다. 학원 화장실에서 펑펑 우는 언니에게 나는 아무 말도 건넬 수 없었고 밖에서 언니를 조용히 기다렸다. 한참을 울었을까 언니는 시뻘게진 눈으로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그만둘까 생각도 해봤는데, 관두는 건 더 공포스럽더라고.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거 뿐인데… ”
은비 언니는 자신에게 연기라는 건 꼭 거꾸로 잡은 칼 같다고 했다. 좋아서 시작한 연기가 자신을 이렇게나 비참하게 할 줄 몰랐다며, 내가 어떤 위로의 말을 해도 언니에게 내 마음이 닿을 것 같진 않았다. 왜냐하면 지금 언니의 모습은 누군가 몸을 한 군데를 뚫어서 훔쳐간 것처럼 텅 빈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옆을 지켰다. 한참을 울던 언니는 내게 이제 연기는 그만둘 거라고 했다. 그리고 꾸역꾸역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자신은 예쁘지 않아 주연 배우는 못 되었을 거라고. 주인공이 아닌 배우가 무슨 의미가 있냐며. 이게 차라리 잘됐다며.
그리고 내게 자신의 몫까지 꼭 배우의 꿈을 대신 이뤄달라고 했다. 내가 꿈을 이루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좋을 것 같다며. 너는 주연 배우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언니의 손을 꼭 부여잡고 굳게 다짐했다. 언니의 꿈까지 대신 이뤄주리라고. 그럼 언니도 나도 다 괜찮아질거라고.
언니의 일에 대한 여운이 다 가시기도 전에 나는 들뜬 새내기가 됐다. 작년까지 연습실에 처박혀 연습만 했던 나와 동기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매일매일 술자리를 이어나갔다. 다들 고된 다이어트에 대한 엄청난 보상심리로 고칼로리 안주들을 늘 술과 함께 시켜 먹었고, 잘난 아이들끼리 모였기에 작은 유흥들도 즐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간고사 시기쯤 되자 입학식 때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들 조금씩 살이 불었다. 물론 나는 열외였다. 나는 한참 입시를 할 때랑 별 차이가 없었다. 동기들은 그런 나를 보며 너는 천생 배우 체질이라며 치켜세워주기 바빴다. 나는 겉으론 아니라며 겸손을 떨었지만, 그 말들에 대해 상당 부분 동의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런 술자리와 같은 유흥은 자제 하기 시작했다. 나는 하루 빨리 진짜 배우가 아니 주인공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배우라는 직업은 내게 꼭 천직 같았다. 연기를 할 때면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튀어나왔다. 그러다 완전히 몰입된 순간 압도적인 희열감이 찾아왔고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다. 누군가에겐 직업이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라면, 내겐 배우라는 직업은 그 이상의 남다른 의미였던 것 같다. 내가 살아있음을 세상에 각인해주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타고난 것들 덕분에 연출과 학생들의 작품에 캐스팅 1순위였다. 어떤 선배는 내가 자신의 페르소나라고 말해주었고, 어떤 후배는 단편영화제에서 나온 나를 보고 이 학교에 지원했다고까지 말해주었다. 그렇기에 자존감과 자신감을 가장 큰 무기인 이 사회의 출발점에서 나는 정말로 무서울 게 없었다.
졸업을 앞둔 그맘때쯤 타이밍도 좋게 내게 한 독립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 제의가 들어왔다. 자식을 버리고 간 부모에게 복수를 하는 역할이었는데, 그동안 갈고 닦은 나의 내공을 선보이기 딱인 작품이었다. 이제 여기서 조금만 더 노력 하면 상업 영화로 데뷔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스크린을 꽉 채우는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나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거친 현장에서 몸을 아끼지 않고 연기 했다. 그리고 촬영 막바지 날 부모가 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씬에서 소품으로 사용한 연막기구가 폭발했고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
스물 셋의 5월, 나는 2도 화상을 진단 받았다, 머리 쪽에 화상을 입었고, 얼굴까지 살짝 번졌다. 치료가 잘 끝나도 얼굴에 변색이나 흉은 남을 거란 의사 선생님의 통보가 이어졌다. 나는 담담했으나 부모님은 말도 안된다며 울음을 터뜨리셨다. 그렇지만 담당 의사 선생님은 세상에는 말이 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기도 한다며 사무적인 반응뿐이었다. 그리고 간호사 선생님은 다음 내원 날짜를 잡자며, 나를 수납실로 이끌었다. 앞으로 시작될 고된 치료에 대한 걱정에 앞서, 카메라 앞에 설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두려워졌다. 그렇지만 치료가 잘 끝나서 내가 다시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버릴 수 없었다. 배우가 아닌 나는 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런 마음으로 나는 일년동안 치료에만 묵묵히 전념했다. 매일 같이 드레싱을 받아야 했고, 피부이식 수술도 몇 차례에 걸쳐 진행이 됐다. 화상 때문에 다 빠져버린 머리 탓에 치료가 어느정도 된 후엔 모발 이식까지 해야했다. 온몸이 찢기는 듯한 고통의 순간들의 연속이었지만. 나름대로 의연하게 버텨냈다. 어느덧 피부가 잘 재생되어 다행이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과 함께 치료는 끝이 났다.
이마와 왼쪽 얼굴에 앞으로 평생 나와 함께 할지도 모를 흉터를 마주하게 되었다. 얼굴에 흉터 몇 개가 남았다고 해서 일상생활에는 큰 지장은 없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아니 이건 전혀 다행이지 않았다.
우선 다 사라져 버린 내 머리카락이 자랄 때까지 기다려보기로했다. 그리고 매일 같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어떤 흉터도 언젠가 희미해지기 마련이니 이 흉터도 언젠간 사라지지 않을까. 완전히 회복되는 데까지는 얼마나의 시간이 걸릴 줄 모르는 일이었지만 나는 기다렸다. 하루하루 안 좋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혹시 배우가 되지 못한다면 나는 정말 어떡하지.
결국 우울에 빠진 나를 사촌 언니는 교회로 데리고 왔다. 사람들과 어울리라며 청년부에 들어갈 것을 권했지만, 혼자 열아홉에 멈춰버린 것 같은 나는 내 또래들은 도무지 부담스러웠다. 결국 나는 집사님의 배려로 중고등부에 들어왔다. 물론 중고등학생들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내게 관심을 준 건 뜻밖의 사람이었다. 수현은 오지랖이 하도 넓어 교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조금 반반했으니 사람들이 끊이질 않았다. 수현은 소위 말하는 ‘인싸’였다. 한없이 해맑은 수현은 내게 아무렇지 않게 다가와 말을 걸어댔다.
“너랑 같은 학교래.”
“알 게 뭐야.”
말을 좀 튼 정돈데, 드디어 친한 사람이 생겼다며 혼자 흥분한 사촌 언니는 나를 수현 앞에 세웠다. 그리고 자꾸 더 말을 걸어보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머리는 왜 길러요?”
언니의 등쌀에 못 이겨 하는 수없이 말을 걸었지만, 도무지 수현의 인적 사항엔 궁금한 것이 없었다. 그래도 이 더운 날씨에 굳이 치렁치렁한 장발을 한 이유는 물어볼 만했다.
“아, 영화감독들은 원래 장발을 합니다.”
“영화감독이에요?”
“아뇨. 아직은 영화학돈데…곧 졸업하면 입봉을 하겠죠?”
“그러시구나.”
수현은 많이 긍정적이었고, 많이 가벼워 보였다. 영화를 전공한다고 다 영화감독이 되나. 뭘 믿고 저렇게 낙천적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수현은 무언가 크게 힘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마까지 할 거라며 묻지도 않은 자신의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는 수현이 예술에 조예가 깊어 보이진 않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수현과 언니는 계속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수현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근데 지은씬 배우의 얼굴을 가졌어요.”
순간 우리 셋 사이엔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내 두 눈엔 눈물이 고였고, 언니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나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연기를 관둔 이후로 우리 집에서는 연기의 연, 배우의 배, 모두 언급 금지 수준이었는데, 영화감독을 하겠다는 저 눈치 없는 남자는 결국 날 울려버린 것이다. 자신은 얼굴만 봐도 기가 막히게 뜨는 신인배우들을 맞히는 능력이 있다며, ‘한 번만 모자를 벗어 줄 수 있냐’, ‘연기를 해보는 건 어떠냐’는 등의 입방정을 떠는데, 나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떠버렸다.
며칠 뒤, 집 앞으로 수현이 찾아왔다. 언니에게 사정을 전해 들었는지 내게 사과를 했다. 언니는 수현이 몰라서 그랬으니 그만 용서하는 건 어떠냐고 말했지만, 그건 면죄부가 될 수 없었다. 다만 틈만 나면 계속 우리 집 앞에 찾아오는 수현이 신경 쓰이긴 했다. 나중에는 수현의 이상한 그 파마머리까지 귀여워 보일 지경이 되니, 나는 그만 수현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 말았다. 수현과 함께 집 앞 호수공원을 걷기 시작했다. 여길 두 바퀴 정도 걸으면 만보가 채워진다는 시덥지 않은 얘기나 나누면서. 수현과 제법 오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왜 사람들이 수현이란 사람을 좋아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수현은 생각도 없어 보였지만 편견도 없어 보였다. 마치 모든 것을 수용해줄 것 같은 스펀지같은 그러나 나의 이야기를 머금지는 않을 것 같은 그런 사람이었다. 수현과 있는 시간이 편했다. 나는 수현에게 조심스레 내 얘길 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왔었는데, 치료 때문에 몽땅 밀었어.”
“그럼 샴푸 하는데 3초 컷이었겠네.”
악의 하나 없어 보이는 순수한 표정의 수현을 보고 나는 웃음이 빵 터졌다. 우리는 자연스레 연인이 되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기 싫어하는 나의 탓에 우리는 주로 심야에 영화관에서 데이트를 했다. 나는 불이 암전되는 캄캄한 극장에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적어도 두 시간가량 동안은 복잡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그곳이 나에겐 최고의 공간이었고, 자칭 영화광인 수현에게도 가장 좋은 장소였을 것이다. 물론 영화의 내용은 잘 안 들어왔다. 물론 일부로 잘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나는 주로 영화를 보는 수현을 감상했다. 잔뜩 집중한 초롱초롱한 눈빛과 자세. 좋은 영화를 보고 나면 흥분해 들 떠 있는 모습.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수현의 얼굴이었다.
“끝났다. 이제 그만 가자.”
“잠시만. 크레딧은 다 보고 가자. ”
그만 일어서려는 나를 수현이 붙잡았다. 영화인이라면 지켜야 할 매너라며, 영화에 아주 작게라도 참여한 사소한 인물들까지 새겨지는 엔딩크레딧을 수현은 그 어느 장면보다 유심히 보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강아지 이름까지 써주는 엔딩 크레딧을 보며나는 새삼 내가 아는 전부가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나 저기에 이름 나오는 게 꿈이야. 가장 맨 앞이면 좋을 것 같다.”
자신의 꿈을 얘기하는 수현의 얼굴이 정말 행복해 보였다. 살짝 설레이는 듯한 수현의 표정. 그것 역시 내가 좋아하는 얼굴이었다.
***
다음 해, 수현과 나는 학교에 복학했다. 입학했을 때에 비해 시간이 많이 흐른 상태라 아는 얼굴은 없었다. 그리고 연기와 전혀 관련 없는 상경대로 전과했다. 가끔 수현을 보러 예대 건물로 오면 연기과 돕바를 입은 학생들이 보여 괴롭긴 했지만, 수현과 함께라서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넘쳐나는 상념들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든 나서서 지원했다. 창업경영 동아리, 주식금융 동아리 등 전혀 관심 없던 분야의 동아리에도 들어가서 사람들과 어울렸고, 학교 수업도 복수전공까지 신청해서 꽉꽉 채워 들었다. 그렇게 바쁘게 살다 보니 그동안 내게 벌어졌던 일들이 아득한 과거 일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영화감독을 꿈꾸는 수현은 학교에선 제법 진지했다. 촬영을 준비할 때는 평소 수현 답지 않게 예민한 모습도 많이 보이곤 했다. 나는 그런 수현의 모습을 보는 것이 가장 좋았다. 수현의 꿈이 꼭 이루어지면 나 역시 너무 행복할 것 같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수현을 도와 연출에 대해 이것 저것 의견도 내보고, 영화 제작 과정에도 참여를 해보았다.
수현의 졸업작품 촬영이 시작되었다. 중간고사 기간과 겹쳤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수현을 도왔다. 촬영 예산을 짜고, 로케이션 헌팅까지 나서서 다녔다. 내 시험에 집중했으면 좋겠다는 수현의 말에도 불구하고, 난 수현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답안지를 어떻게 적어냈는지도 모른 채 수현의 현장으로 달려갔다.
숨이 가쁠 정도로 뛰어 도착한 현장에서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내가 좋아하는 수현이 아닌 카메라 앞에서 연기 중인 한 배우였다. 그 배우는 중요한 독백 장면을 찍고 있었고 컷 소리가 나자 수현을 포함한 스탭 모두가 그 배우를 향해 박수를 보냈다.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리고 하염없이 울었다. 여전히 다행인 건 하나도 없었다.
***
한참을 변기에 앉아있다가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손을 씻으려 세면대에 선 순간, 거울 앞에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불을 꺼버려서 얼굴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거울 앞에 서면 늘 가슴이 철렁거린다. 사고 이후 생긴 내 얼굴의 흉터를 볼 때면, 나는 다시 그 사고 현장 속으로 끌려가는 기분이 든다.
그때, 화장실 불이 켜지며 누군가 다급하게 옆 칸으로 들어가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가갔더니 여자는 관심은 됐다는 듯 손으로 저리 가라는 표시를 했다. 여자는 다름 아닌 주보나였다. 아무래도 직원들과 점심을 함께 한 모양이었다. 내 발언에 너무도 싸해졌던 사무실 분위기의 이유가 단 한 번에 유추 가능한 순간이었다. 주보나는 자신의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한 채 먹은 걸 다 토해내며 괴로워 보였다. 그런 주보나가 조금은 안쓰러워서 나는 말 없이 뒤에서 등을 토닥여 주었다.
“감사해요.”
“아니에요. 체하신 것 같은데 소화제 같은 거 사다 드릴까요? ”
“됐어요. 그냥 원래 자주 이래요.”
그렇게 서로 몇 마디 주고받고, 우리는 잠시 함께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주저 앉아 있었다. 고요한 정적만이 흘렀다. 이보나의 손등과 손가락엔 언제부터 이어졌던 건지 모를 그녀의 지난 괴로운 시간들의 흔적들을 보여주듯 흉이 져 있었다. 나는 이보나의 얼굴을 몰래 바라봤다. 그러다 순간 이보나와 눈이 마주쳤다. 민망한 마음에 나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저 팬이에요.”
“뻥 인 거 알아요. 아까 다 들었어요.”
미안하다는 나의 사과에 됐다며 쿨하게 넘기는 이보나는 내게 입가심용 사탕을 건넸다. 나는 몸을 털고 화장실 바닥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보나를 일으켜 주기 위해 손을 건넸다. 이보나는 내 손목을 한참 바라봤다.
“되게 말랐네요. 나 일으킬 힘은 있어요? 자빠지겠구만.”
장난스런 이보나의 말에 나는 주보나를 있는 힘을 다해 일으켰고, 그러면서 살짝 휘청거리는 내 모습에 우리는 웃음이 터졌다.
“팬 맞아요.”
“욕하는 거 다 들었다니깐요?”
저도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며 주보나는 새침하게 밖으로 나갔다. 나는 불켜진 화장실에 혼자 남아 주보나의 손등과 손가락에 있던 흉터들을 떠올렸다. 조심스레 거울 앞에 다가섰지만 역시 자동반사처럼 눈을 질끈 감을 뿐이었다.
***
졸업 작품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수현이 학교를 떠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나는 마지막 학기를 다니며 취업을 준비 중이었고, 수현은 여기저기 공모전을 내며 입봉을 꿈꿨지만, 그렇다 할 성과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만난 수현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긴 머리를 싹 둑 자른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왠지 섭섭했다. 심경에 변화라도 생겼냐는 물음에 수현은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실컷 보게 해주려는 의미라며 웃었다. 한동안 우리 둘 사이엔 정적이 흘렀다. 수현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이제 그만 둘 거라는 신호야?”
“언제까지 입봉 만을 기다릴 순 없잖아”
“영화감독이 꿈이라며.”
“미국에 있는 대학원에 겨우 붙었어. 마케팅이랑 제작 공부를 하려고.”
“영화감독은?”
”제작사에 들어가려고.”
날 두고 미국에 간다는 게 슬펐던 걸까. 아니면 꿈을 포기하는 수현의 모습이 슬펐던 것이었을까. 내가 좋아하던 수현은 누가 뭐라 해도 무대포로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만 같았는데. 우리는 이별 없이 헤어졌다. 수현이 그리웠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그리고 수현이 떠난 뒤 시간이 꽤 흘렀다. 나는 개봉하는 외국 영화가 있으면 영화관에서 찾아봤다. 깜깜했던 영화관에 다시 불이 들어오고 혼자 남아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그곳에서 영어로 적힌 이름 중에서 혹시 있을지 모르는 수현의 이름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어디에도 수현의 이름은 없었다.
***
“지훈아 아무래도 여긴 다음에 예약하고 다시 와야겠다.”
저녁을 먹기 위해 지훈과 찾은 대학로 돈까스 맛집은 이미 만석이었다. 몇 시간을 기다려내서라도 기어코 먹겠다는 지훈의 의지 때문에, 우리는 웨이팅을 걸어놓고 잠시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세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한다는데 뭘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연극 포스터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고도를 기다리며’.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지훈의 손을 잡고 소극장으로 향했다. 연극은 주인공 두 명이 거의 이끌어 가지만, 나는 중간에 등장한 조연 한 명이 눈에 계속 밟혔다. 익숙한 목소리와 움직임,
지훈 역시 그 여자 조연이 눈에 띄었나 보다. 조연인데도 불구하고 발성이랑 표현이 남달라서 기억에 남는다며 지훈은 연극 팜플렛에서 기어코 그 이름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이름은 내가 예상했던 그 이름이 맞았다.
“누나. 근데 저 연극 진짜 재미없다.”
“난 재밌던데. 너가 이해를 못 해서 그래”
“그래서 고도는 왜 안 오는 건데?”
지훈의 질문에 난 웃음이 터졌다. 이젠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주문한 돈까스를 기다리며 지훈에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지훈의 표정을 보고 그냥 말을 멈추었다. 때마침 식당에 걸려있는 티비에서 주보나의 신작 캐스팅 소식을 알리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방송을 보는 나와 달리 지훈은 내 눈치를 살피는 듯 했다.
“누나 주보나 뒤에서 욕하다 걸렸다며. 같이 작업할 수 있겠어?”
“나 걔랑 친해”
지훈의 말에 먹던 돈까스를 뱉을 뻔했다. 나는 지훈에게 이보나의 열렬한 팬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름 진심이라고 생각하고 대답했지만 갑자기 씹고 있던 돈까스가 골판지처럼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내겐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조금은 성장했을지도 모를 나를 기대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거울 속의 나였다. 거울 앞에 가까이 다가가 내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나는 이렇게 생겼었구나.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조심스레 묻어뒀던 수현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어디선가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을 것 같았다. 잘 못 찍히는 점은 없다. 우리는 무수한 선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수현 역시 어디선가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믿게 됐다. 계획대로 풀리진 않아도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도 선을 살짝 바꾸어 그린다면 어디엔가 점은 찍히기 마련이니까. 나라는 영화 속 유일한 방점은 나일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