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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보내고

(난 나쁜 딸이었다.)

by 김수기

"아무래도 엄마를 요양병원으로 모셔야겠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니?"

갑작스러운 친정 오빠의 부름을 받고 여동생과 친정으로 갔더니 오빠가 말했다. 10년 전,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충격이 크게 다가오셨는지 갑자기 단어가 생각이 안 나고 전화번호도 생각이 안 나서 못하겠더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서 엄마가 예전하고 조금 다르다는 것을 생각은 했지만 연세가 여든을 넘어서 그런가 보다 했다.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출장을 가는 날에는 마치고 늦게라도 들리고 휴일에도 친정에 가면 올케의 높은 목소리를 듣곤 해서 오빠의 그 말에 놀라지는 않았다.

'아, 말로만 듣던 부모님을 요양병원에 모신다는 이야기가....'

나는 시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직장 생활을 하는 우리는 시어른들께서 아이들을 지극 정성으로 봐주셨고 그 덕분에 아이들은 건강하고 바르게 성장했다.

같이 사는 시부모님께 신경을 쓰다 보니 오빠가 모시는 친정 부모님께는 가끔 용돈을 드리고 옷 사드리는 정도였다. 내가 며느리로서 시어른을 모시고 살기에 같은 며느리 입장인 친정 올케의 마음속이 들여다보여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오빠 후배가 운영한다는 요양병원으로 모신 지 1주일 후에 여동생과 면회를 갔더니 요양사님이 엄마가 보따리를 싸고 집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자꾸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 어떤 것인가를 알았다. 내 정신이 아니었다. 코로나가 발병해서 칸막이 넘어 손을 잡으니 간호사가 막았다. 나는 소리를 질렀다. 내 엄마 손도 못 잡느냐고?

안 되는 줄 알기에 더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혹시나 추울까 봐 손뜨개로 짠 모자를 씌워주고 동생과 나는 병원문을 나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우리의 눈을 바라보지 않던 초점 잃은 엄마의 모습을 떠 올리다 나는 졸음쉼터로 가서 차를 세우고는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울면 뭐 하는데? 엄마는 벌써 치매가 오고 큰 딸, 작은 딸도 못 알아보는데, 그동안 니는 뭐 하며 살았니?' 싶었다.

비록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얼굴만 바라보며 엄마! 엄마! 부르다 오는 면회였지만 우리는 허락하는 시간만 되면 열심히 다니며 보고 울곤 했다. 뭐라도 해 줄 수 없다는 미안함에, 그동안 불효의 못남에, 후회의 울음소리라서 부끄러워 크게 소리도 못 낸 혼자만의 통곡이었다. 요양병원에 가신지 1년 10개월 마지막날에 엄마는 코로나에 감염되어 우리 곁을 떠나셨다. 동네 뒷산 아버지 곁으로 가시던 날, 엄청 추웠던 12월 초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내고 농사꾼인 아버지와 결혼을 하시면서 시작한 한복 만들기를 여동생 막내를 시집보내고 그만두시고 친 손주들 뒷바라지에 전념하시던 내 엄마였다. 오직 자식 생각뿐이셨던 엄마에게 내가 해 드린 것이 없다. 난 나쁜 딸이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하지만 엄마가 살아 계실 적에 더 잘하지 못한 점만 자꾸 떠오르는 나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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