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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Aug 05. 2022

책임감, 그게 뭐라고

바보...

1년의 연봉 계약서를 작성하고, 최저시급 수준의 월급이지만 장기적으로 근무가 가능하다는 작은 안도감, 이제야 전공 커리어를 쌓게 되었다는 꿈에 부풀어 시작했던 요양병원 영양사 근무는 3개월을 채우지 못했다. 세후 190이 되지 않는 열악한 수입이지만 일은 익숙해질 테고, 장기간 근무한다면 연봉도 오르겠지 (최저시급이 오르는 만큼이겠지만) 작은 희망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고강도 노동(영양사인지 시급 알바인지) , 거의 매일 강요되는 pcr검사, 휴무도 반납해야 할 만큼 과한 업무량(알고 보니 노동과 서류업무가 가능한 시급 알바), 반납한 휴무에 대한 임금 지급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식 이하의 병원의 처우에 더 이상 근무할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 그만둔 병원의 기억 때문에 더 학교에서 근무하고 싶었다. 하지만 꽤 오랜 시간 경단이 된 나이 많은 영양사가 학교에 취업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두 달의 무급 기간이 있어도 기간제 실무원이라는 낯선 업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계약 기간은 6개월인데 3개월 근무 후 계약 종료, 2개월 무직, 다시 3개월 근무, 교육 관련 실무 보조인만큼 학교의 방학 기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은 알지만, 이 애매한 근무기간 때문에 고민이 되었다. 설마 되겠어? 하는 마음으로 기계적으로 넣은 원서에 면접까지 합격하고 나니, 다른 대안이 없는 상황에서 일단 근무할 수밖에 없었다. 실업급여도 받을 수 없고, 무급 기간은 해직 상태가 되지만, 2개월의 무직 기간에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 모든 것을 알지만 그냥 시작해버렸다. 나중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 일을 생각 중인 현재의 나는, 2개월 무직은 생각보다 많은 부담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깨닫고 있다. 다른 곳에 취업을 하고 그만둘까? 몇 번을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냥 무책임하다고 몇 번 욕하고 말겠지, 내 코가 석 잔데 , 내가 아니어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인데 뭐, 사람은 또 채용하면 되는 거잖아, 스스로를 설득해본다. 하지만 바보인 나는 그럴 자신이 없다. 애초에 근무 기간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근무 의사를 밝혀 놓고, 이제 와서 다른 곳에 취업이 되었으니 다시 채용하라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다. 


바보... 누가 알아준다고.

책임감 있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고, 계약이 종료되면 다시 안 볼 사람들 아닌가. 

눈 질끈 감고 영양사 채용 공고가 난 학교에 원서를 접수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도 받았다. 면접을 본다고 합격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안다. 그렇게 떨어진 학교가 벌써 몇 군데인가. 학교는 경력이 적은 지원자에게 절대 호의적이지 않다. 


하지만, 혹시, 정말 혹시 합격이 되면 나만 생각하고 갈 수 있을까? 

합격 가능성이 거의 없는 면접을 앞두고 고민 또 고민을 했다. 

답은... 없다. 

내 상황이 절박하지만 그럴 자신이 없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책임감이 뭐라고, 도망치듯 퇴사해버린 병원이 떠올라 더욱 그럴 수가 없다. 기간을 채우지 못하고 나가는 것이 꼭 실패하는 것만 같아서, 그런 내가 너무 못난 것만 같아서. 


결국 나를 설득시키는 데 실패한 바보는 면접을 포기했다. 

아마 4개월 후에 또 취업을 고민하며 지금의 나를 후회하겠지. 

'바보... 그때 갔어야지. 누가 알아준다고. '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던 어떤 바보가 그렇게 후회하고 있겠지. 

4개월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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