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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어문 Oct 24. 2021

킬미힐미 : 부캐가 필요했다.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다

킬미힐미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도현은 일곱 가지 다른 인격을 가진 캐릭터이다. 감당할 수 없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도현은 어쩌다가 다중인격이 되었을까? 정말 다중인격이 존재하는 걸까? 궁금했다. 





다중인격장애란 한 사람이 둘 이상의 인격을 가지고 있는 정신 질환이라고 한다. 한 사람의 내부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정신 상태의 일부분들이 일시적으로 그 사람의 전체를 조종하는 것이다. 의학계에서는 1994년 다중인격이라는 병명을 해리성 정체 장애(dissosiatine identity disorder)로 변경하였다.

(출처 : 두산백과)


단순히 드라마 속 설정인 줄 알았는데 실제의 증상과 매우 유사하게 표현되어 있다. 도현은 자신의 상처를 감당하지 못해, 인격을 여러 가지로 분리해서라도 그 상황을 견디어 낸 것이다. 누군가는 도피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견디어 낸 것이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에서 무사히 성장을 해 내었으니까.




삶에 찾아오는 고통은 대부분 나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선해서 복을 받는 게 아니듯이, 내 잘못으로 고통받는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매우 불공평하지 않은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나의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고 하겠지만, 우리는 태어날 의지도 부모를 선택하지도 않았다. 복불복인 것이다.


트라우마로 해리성 정체감 장애가 생길 정도는 아니더라도, 살다 보면 뜻밖의 고통을 당하는 순간이 온다. 스스로 평범하고 평탄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내 인생을 내가 결정할 권리가 몇 살쯤 생길 것 같은가. 아이가 주민등록증을 만들 나이가 될 즈음이 되니 티끌만큼의 권리가 생겼다. 진로를 결정하고, 배우자를 만나고, 심지어 출산을 하는 문제까지 오롯이 내 선택과 결정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결과가 좋았다면 다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했다면? 책임과 감당은 내 몫이 된다. 억지로 등 떠민 것도 아니니 원망도 나 자신에게 밖에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게 틀어지고 헝클어지고 나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느껴졌을 때, 우연히 가게 된 콘서트. 

음악을 좋아하지만 굳이 공연장에 왜?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즈음 극도의 우울감이 나를 눌러 숨 쉬는 것조차 힘든 상태였다. 


라이브로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를 듣는데 뭔가 알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쳐 올라왔다.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 같은 거였다. 꾹꾹 눌러 담았던 원망과 나에 대한 가여움이 눈물로 터져 나오면서 노래를 듣는 내내 울었고, 후련했고, 숨이 쉬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늦은 나이의 덕질이 시작되었다. 10대 같은 덕질은 아니지만, 팬카페에서 글로 소통하는 것이 유일한 숨구멍이었다. 덕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감정을 풀어낼 공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 덕분에 나는 내가 글을 쓰면서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브런치까지 찾아오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곳에서 쓰는 닉네임은 또 다른 나였다.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이 가슴을 짓눌러 숨이 막힐 때마다, 도현이 신세기를 불러내듯, 나는 또 다른 나를 불러내어 그곳에서 잠시 놀다 왔다. 그렇게 조금씩 버티고, 숨을 쉬고, 내 삶에서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모 여자 아이돌이 자신의 부캐로 살아가는 게임 속 세상이 쉼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현실의 내가 버거울 때 잠시 쉬었다 올 수 있는 부수적인 캐릭터가 있다는 건 나를 돌보는 자가치료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마음에 더 큰 병이 들기 전에 그렇게 묵은 감정과  스트레스를 풀어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덕질로 시작되어 어찌어찌 흘러온 브런치이지만, 이곳에서 글을 쓰고 있는 디어 문도 또 다른 나이다. 나도 모르던 나를 꿈꾸게 해 주고, 가장 본연의 나로 나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너무 늦어서, 재능이 없어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설레는 일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 자신이 치유받는 느낌이 든다. 뭔가를 할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할 수 없다고 해도 과정이 이토록 즐거운 일을 또 만날 수 있을까. 그래서 이곳이 소중하고, 이곳에서 나를 돌볼 수 있는 나를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행복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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