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을 해지했다. 실손보험, 건강보험 모두. 7만 원으로 시작한 보험료가 갱신이 되면서 11만 원이 넘어가고, 3만 원대로 시작한 아이들 보험이 5만 원대가 되었다. 필요 없는 보장을 빼고 싶어도 기본 계약이라 안되고, 설계사 말을 듣고 있으면 빼면 안 될 것 같고, 그래서 유지했던 보험인데 갱신이 되면서 부담이 커졌다. 그간 납입 보험료가 1400만 원 가까이 된다는 사실을 어제 알았다. 순수 보장형이라 환급금이 없는 줄 알았는데 3분의 1 정도 환급받았다.
중증질환에 걸린 적은 없으니 그동안 보장받은 금액은 국가 검진에서 해주지 않는 초음파 검사의 일부이다. 1400만 원을 납부하는 동안 100만 원도 보장받지 못했다. 그나마도 건강한 상태에서 받은 검진은 실비 보장을 받을 수 없기에 의심 증상이 있어서 검사받았다고 해야만 보장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상소견이 없다는 결과를 받아도 검사 이력만으로 실손 가입이 거절된다. 받아주는 곳이 있어도 할증과 부담보 기간이 있다는 조건이 붙는다.
실비 보험은 진료비를 대비하기 위해 가입한 보험인데 보장을 받으면 해지 후 재가입이 어렵다. 인터넷으로 쉽게 가입이 가능하다고 광고하지만 간단한 실손 가입도 되지 않는다. 이럴 거면 인터넷 가입 광고는 왜 한 건지, 나는 나이가 적지 않아서 그렇다 해도 아이들 보험도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실컷 체크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상담 후 가입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상담을 해보니 모든 검사 이력이 문제가 된다. 실비 보상 좀 받아보겠다고 초음파 검사 몇 만 원 청구한 것이 재가입 시 발목을 잡는다. 조직 검사 결과 이상 없는 물혹을 추적 관찰 중이라고 하니 아예 실손 가입이 안된다는 곳도 있다. 제거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더라도 기껏해야 시술 수준일 텐데 마치 큰 병력처럼 부풀려서 이런저런 조건을 붙인다. 어떤 회사는 수면 내시경 비용 청구건도 문제 삼는다. 납득하기 어려웠다. 주기적으로 검사하는 것은 건강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뜻인데, 검사를 자주 해서 발병률이 높다는 게 맞는 말일까. 일 년에 보험 청구 1회도 할까 말까 한 우리 가족 같은 경우도 분명 많을 텐데, 보험 회사의 적자는 대체 어디서 발생하는 건지 궁금하다.
계약 해지 전 보장 내용을 다시 살펴봤다. 모두 필요한 보장이었을까? 확인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왜? 모르니까... 보험 약관의 문장들은 왜 이렇게 길고 복잡하고 어려울까? 조사와 어려운 용어들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어서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풀어쓸 수 있는 문장을 일부로 어렵게 쓴 걸까? 읽다 보니 오기가 생긴다. 반드시 이해하고 만다는 쓸데없는 승부욕으로, 2박 3일을 꼬박 보험 영상만 봤다.
꼭 필요한 보험 특약, 실손 4세대의 등장, 암보험 필수 특약, 납입 기간과 보장 기간 등등 많기도 하다. 봐도 봐도 끝이 없는 보험 용어. 몰라도 계속 들으니 알 것도 같고, 더 헷갈리는 것 같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아무리 좋은 보험도 유지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 세상 모든 재해와 질병을 대비할 수 없다는 것. 결국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맞게 설계하는 게 답이다. 보장 내용보다 유지 능력에 맞게 설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상식적인 결론이다. 설계사의 설명만 들으면 잊어버리는 게 문제지만.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지. 계속 듣고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진다. 그분들 주변에는 운 좋게 초기에 암진단을 받고 고액 보험료 타가신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으신 건지. 암보험을 1억 받으려면 한 달에 보험료를 대체 얼마나 넣었던 건지 나는 그게 더 궁금했지만.
영상을 어느 정도 보고 나니 실손과 암 진단비 정도로 가닥이 잡혔다. 기존 보험은 쓸모없는 보장들이 소액이라는 이유로 너무 많았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티끌보다 쓸모없는 소액 보험료가 모여 태산 같은 보험료를 만들어냈다. 다시 가입되지 않으면 어쩌나 잠시 고민되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식비를 아껴서 보험료를 낼 순 없으니. 세상에 공짜는 없구나. 1000만 원 가까운 비용을 들여서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지식을 얻었으니. 처음부터 충분히 공부하고 가입할걸.
시험을 앞두고 있는 아이가 인터넷 강의로 듣는 모의고사가 너무 비싸서 사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한다. 시험에 확실히 도움이 된다면 비용이 좀 들어도 사달라고 했겠지만, 모르니까. 물론 나도 모른다. 인강 업체는 알고 있을까? 강의하시는 선생님은 알고 계실까? 어떻게 알겠어, 그냥 추측하는 거지. 출제자만 알 수 있는 거니까. 그래도 안 사긴 불안하다. 혹시 도움이 되는 교재를 돈 좀 아끼겠다고 안 봐서 후회하지 않을까, 불안하니까.
내 능력을 초과하는 보험을 드는 일도, 시험 대비에 도움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교재나 강의를 듣는 것도, 불안을 줄이려는 노력이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비용을 들여서 대비하는 것이다. 대비가 되기는 할까? 불안을 줄이려고 비용을 치르고 나면 대비했다는 안심이 된다. 아주 잠시. 그리고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쓸데없는 비용을 치른 건 아닐까 하는.
블로그로 부업하기, 글쓰기로 돈 벌기, 일 안 하고 저절로 돈이 들어오는 수익구조 만들기, 이대로만 설계하면 저렴하게 미래를 대비할 수 있다는 보험, 세상에는 돈 버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함께 근무했던 분이 돈이 들어오는 구조가 다 보인다면서, 온라인 스토어 컨설팅을 받아보라고 하셨어요.
돈이 들어오는 게 보이는데 본인은 왜 그 돈을 안 벌고 컨설팅만 해주는 걸까 궁금했습니다. 그분이 말했던 돈이 들어오는 길은 저 같은 사람이었던 거죠. 따라 하기만 하면 수익이 발생한다고 믿으며 컨설팅비를 지불할 테니까요. 정말 돈이 되는 비법이라면 그분이 기간제로 근무하면서 부업으로 컨설팅까지 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사는 데 꼭 필요한 지식도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불안을 다스리는 법, 예산은 적은데 합리적으로 보험 드는 법, 나와 맞는 사람을 알아보는 법, 효율적으로 시험 대비할 수 있는 법, 그런 해법들을 가르쳐 주는 곳이 있으면 좋겠어요. 욕심이겠지만.
어렵고 귀찮아서 설계해 주는 대로 가입했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네요. 모르면 호구 잡힌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 불안은 나만 해결할 수 있는데 말이죠. 적은 돈으로 드라마틱한 가성비를 바라는 마음부터 내려놓아야겠습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