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는 이해하지만,방향이 틀렸다

: 극우에 빠지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 현상·원인·대안

by SOLUNA

광장의 분노, 그 파편화된 초상


오늘날 대한민국의 디지털 광장은 날 선 언어들로 가득하다. 특히 2030 세대로 대변되는 젊은 층의 정치적 성향이 극우나 극단적 혐오의 정서로 치닫는 현상은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특정 집단을 향한 조롱의 배설구가 되었고, '공정'이라는 가치는 타자를 배제하는 논리로 변질되었다.


2024년 12·3 내란 사태 이후, 오프라인 거리로까지 번진 극우 활동은 이 현상이 단순한 온라인 일탈이 아님을 보여준다. 10대들의 인스타그램을 장악한 극우 계정의 조회수는 200만을 넘어섰고, 교실 안 교사들은 학생들의 극우화 문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증언한다.


� 데이터로 보는 현실


한국정치학회 조사에 따르면, 자신을 극우(8점 이상)로 분류한 20대 비율은 7.7%로 40대(11.8%)보다 낮다. '청년 세대 전체의 극우화'라는 단순한 서사는 사실과 다르다.

문제는 수치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과 속도다. 그리고 그 극단화가 10대까지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고, 가장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는 이 세대가 왜 이토록 쉽게 편협한 선동에 포섭되는가? 그 해답의 실마리는 우리가 잃어버린 두 가지, '인문학적 사유'와 '역사의 맥락'에 있다.


사유하지 않는 지성의 비극 — 인문학의 실종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제 풀이 기계'를 양산해 왔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쳤다. 바로 '질문하는 힘'이다.


문해력의 위기와 선동의 토양

현세대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지만, 복잡한 사회 문제를 입체적으로 조망할 문해력은 급격히 퇴보했다. 1분 내외의 자극적인 영상과 커뮤니티 헤드라인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선동가는 '단순한 적'을 던져준다. 비판적 읽기가 불가능해진 세대에게 선동의 논리는 가장 달콤한 정답이 된다.


알고리즘이 완성하는 편향의 터널

처음에는 '남성 역차별'이라는 정당한 불만으로 유입된 청년이, 알고리즘의 추천을 따라가다 어느 순간 역사 부정과 음모론까지 흡수한다. 비교적 젊은 유튜버들은 2030 남성들의 안티페미니즘 성향을 자극해 유명세를 얻은 후 점차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알고리즘은 다음 영상을 끊임없이 추천하고, 극단은 점점 일상이 된다.


상상력의 빈곤 — 공생의 동료가 사라지다

인문학적 성찰이 사라진 자리에는 날카로운 실용주의만 남았다. 나를 제외한 타인은 공생의 동료가 아닌, 내 파이를 빼앗으러 온 침입자로 인식된다. 철학 없는 지식은 흉기가 되어 타인을 향하고, 성찰 없는 분노는 선동의 가장 좋은 땔감이 된다.


"교사로서 체감하는 학생들의 극우화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 12·3 계엄 이후 급증한 극우 콘텐츠로 교실 속 아이들은 전례 없는 위기에 봉착해 있다."— 경기도 현직 고등학교 교사 (뉴스타파 인터뷰, 2026)


분노의 네 가지 뿌리 — 왜 극우인가


젊은 세대가 극우적 콘텐츠에 끌리는 것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뿌리는 누적된 박탈감과 제도 불신에 있다.


① 공정에 대한 집착과 배신감

2010년대 후반 페미니즘이 확산되면서 20대 남성들 사이에서 우경화가 빠르게 확산됐다. 취업은 안 되고, 집값은 오르고,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데 '역차별'을 당한다는 감각. 그 분노는 실재한다. 2022년 대선에서 20대 남성의 58.7%가 윤석열 후보를 찍은 것은 그 감각의 폭발적 표출이었다. 문제는 그 분노가 극우 콘텐츠의 영양분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② 선동가들의 '갈라치기 프레임'

역사의 거대한 흐름과 인과관계를 배우지 못한 세대에게, 선동가들은 이 지점을 정확히 파고든다. "너희가 힘든 이유는 앞선 세대가 기득권을 독점하고 너희의 몫을 착취하기 때문"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은 복잡한 세상을 단번에 설명해주는 명쾌한 복음처럼 들린다. 인문학적 진공 상태와 역사의 몰이해가 결합할 때 최악의 시너지가 난다.


③ 제도 정치에 대한 깊은 불신

전문가들은 2030 남성들이 극우 집회에 나선 이유는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 세력이 어디에도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한다. 어느 쪽도 믿을 수 없다는 결론이, 오히려 가장 확실한 '적'을 규정해주는 극우 서사로 청년들을 밀어넣는다.

④ 민주시민 교육의 공백


학교는 스마트폰을 빼앗을 수 있지만, 알고리즘의 논리를 가르치지 않는다. 세련된 시각적 전략으로 언론 매체와 유사한 외관을 갖춘 극우 콘텐츠 앞에서, 비판적 미디어 교육을 받지 못한 청소년들은 무방비 상태다.


역사의 맥락을 모르면 — 반면교사와 잃어버린 감사


인문학적 진공 상태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은 '기성세대에 대한 맥락 없는 혐오'다. 현재는 과거와 분리된 섬이 아님에도, 사유 능력이 거세된 세대에게 역사는 그저 낡은 이야기일 뿐이다.

역사의 맥락을 무시하고 현재의 욕망에만 충실했던 사회가 지불해야 했던 가혹한 청구서를 보라.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들이 국가 자원을 깎아 먹으며 선심성 복지에만 몰입한 결과는 국가 파산이었다.


� 우리가 잊은 것들

산업화 세대 (7080): 6·25 전쟁의 폐허 위에서 끼니를 굶어가며 자식 교육에 매달린 그들의 희생이 오늘날 글로벌 IT 강국의 자양분이 되었다.


민주화 세대 (5060): 독재와 부패에 맞서 싸운 그들의 투쟁이 지금 청년들이 기성세대를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만들었다.


지금의 풍요는 앞선 세대가 자신들의 현재를 희생하여 만든 '미래를 위한 적금'이다.


이를 모른 채 기성세대를 갈라치기의 대상으로만 치부하는 것은 역사의 맥락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오만한 무지다. 분노가 정당하려면, 그 분노의 대상과 원인이 정확해야 한다. 막연한 혐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다음 세대에게 또 다른 혐오를 물려줄 뿐이다.


극우는 분노의 해결책이 아니다 — 직설적 비판


극우 서사의 핵심은 '적 만들기'다. 여성, 이민자, 진보, 중국, 언론 — 적이 명확해질수록 내 고통의 원인도 명확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구조적 문제를 특정 집단에 전가하는 인지적 착시다.


정치학에서 극우는 단순히 진보의 반대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다원주의를 부정하고 배타적 민족주의·권위주의·반자유주의 정서를 특징으로 하는 이념적 극단을 뜻한다. 보수와 극우는 다르다. 건전한 보수주의는 질서와 전통을 중시하지만 민주주의의 절차와 다원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취업난은 여성 때문이 아니다.
집값은 페미니스트 때문에 오른 것이 아니다.
청년의 고통에는 구조적 원인이 있고,
그 구조는 특정 집단을 혐오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극우는 분노에 방향을 주지만, 그 방향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새로운 피해자를 향한다. 아스팔트 위의 열다섯 살 소년에게 진짜 해방이 아닌 또 다른 감옥을 선물하고 있는 것이다.


나아갈 방향 — 분노를 정치로, 혐오를 사유로


청년의 분노를 진지하게 들어라

'극우 청년'이라는 낙인은 대화를 닫는다. 극우라는 말이 세대와 진영을 가르는 낙인처럼 쓰일수록 공론장은 좁아지고 대화의 문이 닫힌다. 분노의 내용이 정당하다면, 제도 정치가 그것을 흡수해야 한다. 어느 진영도 청년의 박탈감에 진지하게 응답하지 않을 때, 극우는 그 공백을 파고든다.


인문학과 근현대사를 교육 커리큘럼에 복원하라

역사는 미래를 푸는 데이터베이스이며, 인문학은 선동의 파도 속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유의 닻이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똑똑한 바보'로 방치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선동가들의 놀이터가 될 것이다. 알고리즘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혐오 콘텐츠가 어떻게 설계되는지를 가르치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선택이 아니라 민주시민 교육의 기본이다.


보수와 극우의 경계를 스스로 그어라

건강한 보수주의는 민주주의의 동반자다. 극우가 '보수'의 언어로 청년에게 침투할 때, 건강한 보수 진영이 스스로 선을 긋지 않으면 결국 보수 전체가 극단에 잠식된다. 이것은 진보의 문제가 아니라 보수 스스로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유하는 개인만이 선동을 이긴다


아스팔트 위의 그 열다섯 살 소년은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 이 나라가 자기 세대에게도 공정하기를, 자신의 분노가 의미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 바람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젊은 세대여, 당신들이 누리는 풍요의 배후에 숨겨진 거대한 희생의 맥락을 읽어내라. 분노는 에너지다. 그 에너지가 혐오가 아닌 연대로, 음모론이 아닌 비판적 사고로 흘러갈 수 있도록 — 그것이 이 사회의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고, 청년 스스로가 선택해야 할 방향이다.


서로의 역사를 존중할 때, 비로소 우리는 혐오를 멈추고 통합의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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