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그날 밤도 어김없이 지령대 알림이 울렸다.
삐익! 삐익! '코드 1(긴급)'
음주운전 신고였다. 앞서가는 벤츠 차량이 신호를 위반하고 지그재그로 달리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령대 화면에 차량 번호와 예상 경로가 떴다.
사실 음주운전 의심 신고는 경찰 입장에서 꽤 번거로운 일이다.
추격 중 2차 사고 위험도 크고, 검거 후에는 "내가 세금을 얼마나 내는 줄 아냐"부터 "딱 한 잔만 마셨다"까지 온갖 변명을 다 들어줘야 한다.
가족 연락하고 귀가시키는 것까지 지켜보다 보면 정작 시급한 현장엔 못 가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니 확인 결과 음주가 아니면 오히려 고마울 지경이다.
순찰차를 즉시 출동시키고 도주로 차단을 위해 인근 지구대에도 공조 요청을 보냈다.
신고자와는 통화연결이 된 채 추격 중이다.
"지금 ○○사거리 지나가고 있어요!" "여자 운전자예요!" "클락션을 울리고 상향등을 켜는데도 계속 도망가요!"
신고자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자신이 가려던 방향과 다른데도 계속 쫓아가고 있다고 했다. 평소 음주운전 신고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사명감이 느껴졌다.
제주에서 가장 유흥시설이 즐비한 우리 지구대. 금요일 밤이면 음주운전 신고가 끊이지 않는다. 하루 평균 2~3건, 많을 땐 5건이 넘는다.
지금 순찰차가 음주 차량을 추격 중이고, 신고자는 뒤에서 위치를 계속 알려주고 있었다. 검거가 코앞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삐익! 삐익!
또 다른 '코드 1' 알림이 울렸다. 위협 운전 신고. 어떤 차량이 자신을 계속 따라오며 위협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지구대 안이 순간 조용해졌다. 같은 시간, 같은 지역에서 두 건의 긴급 신고라니.
"녹취 들어봅시다."
내가 지령대 스피커를 켰다. 넷이 모니터 앞에 모였다. 녹취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네, 긴급신고 112입니다."
"저기요. 어떤 차가 저를 계속 따라오면서 위협해요. 좀 도와주시면 좋겠는데..."
"어떤 차인가요?"
"모르겠어요. 지금도 계속 따라와요."
"신고자분! 차량 문 절대 열지 마시고요. 지금 위치가 어디쯤이세요?"
"잘 모르겠는뎅..."
"휴대폰 위치 추적할게요. 곧 지구대 경찰관이 연락 갈 거예요."
"네? 꼭 경찰관 만나야 돼요?"
"그래야 안전하지 않을까요?"
"음... 경찰 만나기는 좀 그런데... 시.른.데..."
"네? 무슨 말씀이세요? 경찰차 보이면 도움 요청하세요!"
"시.른.데............."
여자의 목소리는 마치 절친에게 말하듯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홍 경위가 고개를 돌렸다. 입이 반쯤 벌어진 채였다.
"팀장님... 방금 그 음주운전 차량... 혹시 이 신고자 아닐까요?"
나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게. 위협받는 사람치고는 말투가 너무 편한데."
옆에 있던 박 순경도 거들었다. "젊은 여자인 것 같습니다. 싫다는 말을 '시.른.데' 라고 또박또박 끊어서 말하는 게 제 여자친구 말투랑 똑같네요."
"홍 경위, 나가봐."
"네, 알겠습니다."
홍 경위가 순찰차 키를 집어 들고나갔다.
설마 하는 마음이었지만, 확인은 해야 했다.
10분이 지났다. 음주 차량이 우리 관내를 벗어나 인근 지구대 구역으로 들어갔다는 무전이 들렸다.
또 5분이 지났다.
박 순경이 커피를 타다 말고 시계를 봤다. 나도 무전기를 힐끗 쳐다봤다.
바로 그때, 홍 경위의 무전이 들려왔다.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음주운전 차량 검거했습니다. 면허 정지 수치고요."
"그리고... 동일 사건 맞습니다. '시른데' 신고자. 벤츠운전자입니다."
'설마 했는데 진짜라니!'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검거된 벤츠 운전자는 음주 사실을 시인하면서도 계속 뭔가를 항변했다고 한다.
"저 차가 저를 계속 쫓아왔어요! 무서워서 도망간 거라고요!"
"클락션을 계속 울리고 상향등을 켜면서 얼마나 무섭게 했는데요!"
끝까지 자신이 피해자라는 입장을 고수했다고 한다.
음주운전 중에 경찰에게 '위협 운전'을 신고하며 화려하게 자수한 여인.
도움이 필요할 때 경찰을 찾는 건 당연한 권리입니다만 앞으로 이런 식의 '셀프 자수'로는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희도 이런 종류의 상봉은 정말 '시.른.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