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런히 벗어 둔 구두

<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by 알콜헌터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나이, 시간, 장소를 재구성하였습니다.>


여느 일요일 아침과 다름없이 평온한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야간 근무자들과 교대를 마치고 갓 내려온 커피 한 잔의 온기를 느끼던 찰나, 지구대의 무거운 유리문이 거칠게 열렸다.

"저 앞 공원에 사람이 누워 있는데, 바닥에 피 같은 게 보여요."

숨을 헐떡이는 신고자의 말에 평화롭던 아침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주말 밤의 여흥이 가시지 않은 취객이 벤치에서 잠드는 일은 흔하지만, '피'라는 단어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우리는 반사적으로 순찰차를 몰고
현장으로 달렸다.

공원 한복판, 하늘을 향해 누워 있는 남자는 언뜻 봐도 예순을 훌쩍 넘긴 노인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는 구두를 발밑에 가지런히 벗어둔 상태였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보아 갈 곳 없는 노숙자는 아니었다.

신고자의 말대로 그의 손목에서는 붉은 선혈이 흘러나와 차가운 보도블록을 적시고 있었고, 그 곁에는 날을 길게 뺀 문구용 커터칼 한 자루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노인의 생을 끊어내려던 도구치고는
지나치게 일상적이고 초라한 물건이었다.

"어르신, 정신 좀 차려보세요!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의식을 확인하려 어깨를 흔드는 나를 향해 노인이 힘겹게 눈을 떴다.
하지만 그 눈에 서린 것은 구조에 대한 안도감이 아니라, 지독한 짜증과
원망이었다.

"그냥 놔두쇼. 그냥 놔두란 말이요!"
거친 숨몰아쉬며 뱉어낸 그 말은 구조를 기다리는 이의 비명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침범당하고 싶지 않은 자신만의 마지막 영역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거부였다.

뒤이어 도착한 119 구급대원들이
신속하게 손목을 압박 붕대로 감았다. 우리는 신원을 파악하기 위해 보호자의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며 완강히 입을 닫았다.

그때였다. 지갑 속 주민등록증을
확인하려던 나는 노인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보는 순간 턱 아래 가려져 있던 목 중앙에 가로로
최소 10센티미터는 됨직한 깊은 칼자국이 보았다.

노인이 숨을 쉴 때마다 베어진 살점이 벌어졌다 오므라졌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순간 방금 전까지 맡지 못했던 피냄새가 코를 찔렀다.


손목 처치에 집중하느라 미처 보지 못했던, 진짜 '치명상'이었다.

'이 정도 상처라면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하지 않다.'
현장은 거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상처를 보호하려는 구급대원들과 그것을 뿌리치려는 노인의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깡마른 체구의 노인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지, 건장한 경찰과 구급대원 여섯 명이 달라붙어도 제압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살겠다는 의지보다 죽겠다는 의지가 더 강할 때 발휘되는 초인적인 힘이었다.

긴박한 사투 끝에 노인을 구급차에 실어 보냈다. 구급차 안에서 노인이 날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김경위를 동승시켰다.

나는 구급차 뒤를 쫓아 대학병원 응급실까지 내달렸다.

다행히 지구대에서 노인의 딸과 연락이 닿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상황이 일단락되고 지구대로 돌아오는 길, 조수석에 앉은 김 경위에게 물었다.

"그 남자, 차 안에서도 계속 그랬어?"
"아뇨. 처음엔 죽겠다고 난리 더니, 내가 한마디 하니까 조용해지더라고요."
"뭐라고 했는데?"
"죽으려면 아무도 안 보이는 곳에서
죽어야지, 왜 사람 많이 다니는
공원이냐고.
당신 발견한 사람은 무슨 죄냐고 한소리 했죠."

그 비정한 일침 뒤에 노인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었다고 했다.

나는 핸들을 잡은 채 생각에 잠겼다.
목에 남은 깊은 상처를 떠올려 본다. 손목을 먼저 긋고도 죽음이 찾아오지 않자, 확인 사살하듯 목을 그었을 노인의 단호함.

거기엔 망설임의 흔적인 '주저흔'조차 없었다.

그가 칼을 들기까지 거쳐왔을 수많은 절망의 단계들을 끝내 다 알지 못할 것이다.

경찰관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그가 죽지 못하도록 손목을 결박하고 병원 침대에 눕히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그를 살려 응급실에 밀어 넣었지만, 그가 등지고 떠나려 했던 삶의 고통은 단 하나도 해결해 주지 못했다.
어쩌면 김 경위의 모진 말에 노인이 침묵한 건, 자신의 마지막 진심(죽음)조차 타인에게 '민폐'가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비참함 때문은 아니었을까.

구조는 성공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무겁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의 지옥 같은 생을 억지로 이어 붙였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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