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내 소중한 돈 5천만 원을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게 줄 수 있을까?
결론은 '줄 수 있다'
밤 10시가 다 돼 지구대 정적을 깬 60대 중반 아주머니는 급하게 들어오면서 탁자를 탁 치며 말했다.
"로맨스 스캠 알아? 로맨스 스캠!, 나 당했어 어떻게 좀 해줘!"
천천히 말해보라는 직원들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연신 '아이고~ 아이고~'만 외쳤다.
사연은 이랬다.
며칠 전 카톡으로 '우크라이나 남자의사'를 알게 되었고, 일상 일에 대해 톡을 하다 결국 '로맨스'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오늘 제주공항을 통해 그 남자가 입국한다고 해 자신도 오늘 광주에서 제주로 왔다고 했다.
지금까지 제주공항 국제선 대합실에서 기다리다 정신이 번쩍 들어 바로 지구대를 찾았다고.
"마지막 비행기도착하는 순간까지 제임스, 아니 그 남자 기다렸지"
"공항 청경이 출입문 잠그는 걸 보는 순간 다리힘이 풀리더라고"
카톡 내용을 보니 온통 사랑한다는 내용과 빨리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돈은 언제 송금했어요?"
"오늘 했지, 나한테 줄 선물로 '골드바' 가져오다가 문제가 생겨 보증금이 필요하다고 해서 보냈어"
"얼만데요?"
"오천만 원"
지구대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직원들에게서 '헉'소리가 나왔다.
현행 통신사기 피해환급법상 상대계좌 지급정지 사유가 '재화 공급이나 용역 제공'은 제외하기에
지급정지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로맨스 스캠은 '용역제공'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 빠른 흥분상태 아주머니 진정을 위해 우리 팀에서 제일 넉살 좋고 성격 좋은 '박 경위'가 나섰다.
"이모님! 앉아봐!"
아주머니의 성격을 그새 파악한 모양이다.
존댓말 반 반말 반 섞어가면서 사건의 전모를 파헤쳤다.
우크라이나 의사는 한국계로 이목구비가 뚜렷한 40대 훈남형,
광주에서 가게 운영하다 사업을 접으며 모아 두었던 아주머니 전 재산 5천만 원.
그리고 지금 지갑에 남아있는 현금은 3만 원.
주로 '로맨스 스캠' 피해자는 60대부터 80대까지의 나이대를 대상으로 한다.
그간 모아놓은 돈도 좀 있고, 대외활동이 어려워 외로움 느끼는 노인들이 타깃이다.
또한 피해를 봤더라도 남사스럽다는 생각에 쉽사리 신고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아주머니는 남편과 가족이 있기는 했지만 자신이 느끼는 외로움을 다 채워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신이 가진 전 재산을 자신을 알아주고 따뜻한 말로 감싸주는 그 남자를 위해서 썼다.
"이모님, 그 남자 사진 다시 한번 보여줘 봐요."
아주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여줬다. 박 경위는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이모님, 이 남자... 세상에 없는 남자예요."
"무슨 소리예요? 이렇게 사진이 있는데"
"AI로 합성한 티가 나잖아요. 여기 봐요, 귀 라인이 이상하죠? 머리카락 경계선도 부자연스럽고."
아주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진짜 사람이에요."
"이모님..." "아직도 그리워요?"
침묵 끝에 한마디.
"... 응."
박 경위는 지구대 근처 숙박업소 몇 군데 전화를 돌려 아주머니가 묵을 모텔을 찾았다.
태워 떠나는 순찰차 차창 너머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답손을 했다.
박 경위가 돌아왔다.
"잘 들어갔고 내일 아침 광주행 첫 비행기 타겠답니다."
"고생했네... 그런데 혹시...."
눈치 빠른 박 경위다.
"안 그래도 제가 모텔 관리인에게 신경 써서 봐달라고 했습니다. 이상한 행동 하면 바로 연락 달라고 했어요."
허무함이 밀려왔다. 아주머니의 텅 빈 가슴에 생긴 구멍 때문이다.
5천만 원보다 더 아픈 건 그 기나긴 카톡 속의 다정한 말들이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
그 사실을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아주머니의 마음.
순찰차 너머로 흔들던 아주머니의 손이 밤새 잔상처럼 흔들렸다.
로맨스 스캠 아주머니는 다음날 비행기 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