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거짓말

<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by 알콜헌터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좀 창피한 일이긴 한데 뭐 좀 의논할 수 있나요?"

중년 여성 두 명이 지구대 출입문을 열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네 가능합니다. 어떤 일로 오셨나요?"

그녀들은 서로에게 고갯짓을 하며 먼저 얘기하라는 듯 재촉하는 모습을 보였다.


둘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한 명이 말을 꺼냈다.

"아빠가 모르는 젊은 여자하고 문자를 주고받는데 심상치 않아서요!"


둘은 자매 사이였다. 80대 초반 아버지가 우크라이나 여의사와 로맨스 스캠에 빠진 것 같다고 했다.


아직 피해액은 없지만 아버지 명의의 땅과 사업체가 있어 담보대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딸들이 말려봤지만 완강한 고집을 꺾을 수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상담차 방문한 것이었다.


"로맨스 스캠이라고 말씀드려 봤나요?"

"말은 계속했어요. 사기라고. 근데도 도통 믿질 않아요. 우크라이나 여의사라고. 그런 여자 아니라고 하면서요."


"어르신을 한번 지구대로 모시고 올 수 있나요?"

"안 돼요. 이젠 아예 우리말을 듣지도 않으려고 해요."


두 자매 중 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손사래를 쳤다.

"우리가 지금 지구대와 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해도 노발대발하실걸요."


아직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라 깊숙이 개입할 수도 없었고, 예방한다고 찾아가면 딸들 입장이 난처한 상황이었다.


같이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 경위가 어르신을 한번 만나보면 어떨지 의견을 제시했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다.


두 자매, 그리고 나와 이 경위, 네 명이 한참 동안 머리를 맞댔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대화가 원점을 돌고 돌 때였다.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임 경사가 대화를 듣더니 말했다.

"제가 방법 하나 있는데요."

모두의 시선이 임 경사에게 쏠렸다.

"지금 캄보디아 피싱 소굴 단속하고 있잖아요. 할아버지 전화번호도 거기서 나왔다고 하면 어때요? 그 여의사는 캄보디아 남자라고요."


침묵이 흘렀다.


거짓말이었다.

경찰이 시민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 하지만 범죄 예방을 위한 하얀 거짓말이라면?


임 경사는 경찰 입사 전 광고 마케팅 회사를 다녔다. 동영상 촬영과 편집이 박사급이다.

그의 강점은 모든 일을 어렵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이 주어지면 늘 같은 말로 시작한다.

"별거 없어요. 그냥 하면 돼요"


꽤나 그럴싸했다. 물론 딸들도 동의했다.

우리는 전화를 할 날짜와 시간을 정하기로 하고 다시 머리를 맞댔다.


자매 중 언니가 어르신을 찾아간 후 지구대로 알리면 경찰이 바로 어르신께 전화를 하기로 했다.


당연히 수사관 역할은 임 경사다.

임 경사의 설득이 이어지는 동안 동생도 언니와 합류하여 '큰일 날 뻔했다'는 연기를 하기로 했다.


우리의 작전일은 삼일 후다.


D-day.

예정 시간 한 시간 전,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 경위가 받았다. 나와 임 경사는 바짝 다가가 귀를 세웠다.


긴장할 수밖에 없는 게 경찰 제복을 입고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게 맞는지. 혹시 작전 중 어르신이 눈치챈다면.


"경찰관님, 저 000인데요!"

"네, 지금 준비된 상태인가요?"


잠시 침묵.


"정말 죄송한데... 아빠 설득됐어요!"

"네? 그래요?"


"오빠가 아침부터 와서 지금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성공했어요. 호호호"

"아. 그래요. 잘됐네요."


"아빠가 처음엔 자신을 사리분별도 못하는 사람으로 본다며 엄청 화내셨는데 오빠가 계속 말리고 뉴스 내용도 보여드리고 했어요."

"그래도 빨리 받아들이셨네요."


"아빠가 결정적으로 설득된 건 엄마 때문이었어요. 엄마가 우셨거든요. 그때 아빠가 정신 차리신 거 같아요."

"어머님 상심이 크셨겠네요. 아무튼 다행입니다."


전화를 끊은 이 경위가 한숨을 쉰다.

작전이 많이 부담됐던 모양이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임 경사 역시 미소를 짓는다.

연기를 안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나 역시 안도했다.

아무리 하얀 거짓말이라고는 하지만 어르신에 대한 죄송한 일이지 않은가.


전화를 끊고 세 사람은 서로를 봤다.


임 경사가 말했다.

"별거 없었네요. 그냥 해결됐네요."


작전은 실행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 셋은 한동안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안도와 기쁨이 뒤섞인 웃음이었다.


2bba02c0-f59d-401e-8e8d-ec1f4be8b5de.jpg


토요일 연재
이전 08화순찰차 너머 흔드는 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