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발물처리반이 없었어.

<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by 알콜헌터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밤 11시, 나이트클럽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여성 손님이 테이블에 엎드려 자고 있는데 깨워도 안 일어나요."


여경인 이 순경에게 순찰차를 배정했다. 이런 경우는 가급적 여경이 대응하는 게 좋다.

출동한 지 10여 분이 흘렀을까.

순찰차 지원 요청 무전이 들어왔다. 대상자가 많이 취해 과격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순찰차 한 대를 더 배정하고 다시 20분 정도 지났을 즈음 또다시 무전이 날아왔다.


'공무집행방해 현행범 체포'

부축하려는 경찰관들에게 욕설과 발길질이 있었고 이 과정에서 이 순경이 복부 등을 발로 폭행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수갑을 찬 채로 지구대에 도착한 대상자는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이었다.

단발머리는 흐트러져 얼굴을 반쯤 가렸고 머리카락 사이로 보일 듯 말 듯한 눈에서 그녀의 주취 상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친구 두 명과 함께 나이트클럽에 갔고 현장 도착 당시 친구들은 없었고 그녀 혼자 있었다고 했다.


친구들은 테이블에 엎드려 있는 그녀만 놔두고 클럽에서 만난 남자 2명과 밖으로 나간 것이 CCTV로 확인되었다.


우리 직원들이 현장에서 그녀를 깨워보려고 얼음주머니를 갖다 댄 순간부터 폭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체포 현장에서부터 그녀는 소리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신을 이어야 한다!"


순찰차에 태우는 순간.

"윤봉길의 폭탄!"


지구대에 도착해서도 멈추지 않았다.

"내 남편은 폭발물처리반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외침을 추가했다.

"코레아 우라!"


지구대가 떠나갈 듯했다. 마치 안중근으로 빙의한 듯.

"계속 역사 얘기만 하고 있어요. 체포할 때부터"

피해진술을 마친 이 순경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이지현(가명) 씨!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네요!" "혹시 전공하셨나요?"


그녀는 잠시 뚫어지게 나를 쳐다보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대길아~~!"

지구대가 떠나갈 듯했다.

"대길아~~ 빨리 엄마한테 전화해! 기다리고 있어!"

소리가 하도 커 나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자리를 옮기는데도 그녀의 시선은 나를 따라왔다.


"팀장님 혹시 전생에 추노였어요?"

지금의 황당한 상황을 이어가고 싶은지 이 경위가 장난스레 받아쳤다.


"그건 나도 모르지, 내 전생이 뭐였는지"

"그럼 저 친구한테 물어보세요. 왠지 신기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야 됐다. 뭔 소리야!"

"혹시 무당 아닐까요? 젊은 무당도 많다는데"


그녀에게 이제 그만 소리 지르고 가만히 있으라고 조금 언성을 높였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불필요한 말을 자꾸 하는 것도 피곤한 감정노동이다.


그녀는 내 말이 거슬렸는지 계속해서 대길이를 외쳤다. 그리고 듣기에도 거북한 또 다른 말을 이었다.

"너 딸 있지? 지금 큰일 났어! 그러니까 빨리 전화해!"


정말 딸이 있긴 하다. 어떻게 알았지? 그냥 찍었나?

이쯤 되니 이 경위의 말대로 진짜 무당 아닌가 싶었다.


그냥 아무 말 하지 않기로 했다. 팀원들에게도 그녀와 대화를 더 이상 이어가지 말라고 했다.


혼자서 한국 근현대사 썰을 푼 지 30분 정도 흘렀을까. 그녀가 조용해졌다.

왼 손목과 지구대 의자와 부딪히는 수갑의 쇳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앉은 채로 자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무언가에 빙의해 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잠시 상태를 살폈다.

흐트러진 머리, 몸에 들어가 숙성 중인 알코올 냄새, 안주의 흔적으로 보이는 입가의 얼룩.

축 늘어뜨린 오른손 옆에는 유일하게 갖고 있었던 소지품인 주민등록증이 있었다.


서류 작업이 다 돼 그녀를 이송하기 위해 깨웠지만 깊은 잠에 빠져 있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했다.

"이지현 씨, 정신 차립시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곳이 어딘지, 왜 자기가 여기 있는지, 친구들은 어디 갔는지 물었다.


우리가 하나하나 답변을 해줄 때마다 "제가요?", "정말요?", "죄송해요!"를 연발했다.

죄송하다고는 하는데 표정이 해맑다. 이미 과거에 해왔던 일인 듯 답변이 익숙하다.


유치장 이송을 위해 왼손 수갑을 풀며 물었다.

"괜찮아요? 정신 좀 들어요?"

"네 괜찮아요! 정신이 맑아요!"


"이지현 씨, 혹시 역사 전공했어요?"

"아뇨! 제가 뭐라고 하던가요?"


"전혀 기억 안 나요? 대길이는 누구예요?"

"네? 누구예요?"


"결혼했어요?"

"네? 아뇨!"


"지금 무슨 일 해요?"

"아. 네.. 그냥 회사 다녀요"


더 이상의 답변은 피하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구대를 나가면서 그녀는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정말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아니면 철저한 연극일까?


연극이었다면 우리가 관객이고 지구대가 무대였던 건가.


커피머신 앞에 팀원들이 모였다.

"코레아 우라, 윤봉길... 하얼빈 영화 봤나?" "아니면 역사 전공?"

"대길이는 뭐지?"

"추노는 너무 옛날 아냐? 걔 나이에."

"지인 중에 있겠지."


정 경사가 커피를 들며 물었다.

"근데 왜 남편이 폭발물처리반이라고 했을까?"


이 경위가 말했다.

"아까 나이트클럽에서 남자 둘, 여자 셋."


잠시 침묵.


"간택받지 못했잖아. 폭발물처리반이 없었어."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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