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말 속 판돈

<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by 알콜헌터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도박 현장 가면 말이야, 제일 먼저 판돈부터 확보해야 해."

1995년, 초임 순경 시절 처음 나가는 도박 신고였다.


선배가 순찰차 안에서 말을 이었다.

"도착하면 각자 양말을 한쪽씩 벗겨라. 알았지!"


선배는 현장과 떨어진 곳에 순찰차를 세우고 조심스럽게 도박 현장으로 향했다. 주 출입구를 파악하고 뒤쪽으로 가서 창문 등 도주로 상황도 파악했다.


눈을 가까이 들이밀어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작은 틈으로 귀를 세우고 도박사들의 대화에 집중한다.

'원자 태워', '받고 두 장 더!', '곤질', '광땡', '난 죽어'


선배는 안에서 오고 가는 대화에서 현장은 네 명 이상이라고 추측했다.


내게 들어간다는 신호를 주면서 바로 현장 미닫이 문을 좌측으로 당겼다. 하지만 뭔가에 의해 걸렸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안에서는 일대 혼란이 벌어진 듯했다.


'와당탕!, 스으~탁, 조용해!, 치워 치워'

말은 없었지만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다급함. 조용히 말을 하지만 밖에서는 다 들리는 짧은 대화가 바쁘게 오갔다.


"문 열어", "문 열어"

선배는 거침없었다. 다시 한번 강하게 문을 당겼다.


두어 번을 더 당기자 약간의 틈이 벌어졌고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다들 제자리 앉아! 당신들을 도박 현행범으로 체포한다."

멋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드라마 '비질란테' 유지태와 비슷하다는 생각.


4,50대 남자 다섯 명. 한 명은 창문으로 도주했다.

"난 안했수다. 그냥 보고만 있었수다게" "문 다 부서져신디 어떵헐꺼꽈"

"조사하면 다 알 수 있어요. 문은 열라고 할 때 열었어야지!"

선배는 이 모든 말을 다 무시하면서 정주행 했다.


다시 선배의 한마디.

"다들 자신의 판돈 앞에다 놓고 제자리 앉습니다. 거짓말은 마시고"


남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였다.

"난 다 잃어부난 이것밖에 어수다!" "하지 않은 돈은 빼도 되지예?"


남자들은 어떻게든 판돈을 줄여보려고 애를 썼다.

그렇게 꺼낸 돈이 인당 10만 원 정도라 생각된다. 지금 물가에 반영한다면 300만 원 정도 될까 싶다.


판돈이 다 나왔다고 생각되는 순간

"다들 양말 한쪽씩 벗습니다."

남자들이 의아해했다. "예?"

"자신의 판돈을 그 안에 담습니다.", "남 순경은 판돈 걷은 양말 잘 챙겨서 파출소로..."


선배의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양말을 벗기고 그 안에 판돈을 담게 하고 파출소로 데려갔다.


파출소에 도착한 남자들은 자신의 양말을 찾아 판돈 액수를 확인했고 진술서를 한 장씩 작성하고서야 양말을 돌려받았다.

2026년 현재라면 어떨까 싶다.

가능할까? 아니면 인권침해 행위라고 할까?


그때의 비질란테 선배님은 퇴직했지만 도박 신고가 들어올 때마다 그 당시 상황이 떠오른다.


오늘 도박 신고가 들어왔다.


'정 경사'와 함께 현장으로 가면서 비질란테 선배 얘기를 했다.

믿지 않는 눈치다.

"정말로 그랬다고요?", "와~진짜 웃겨요!"


흥미 있게 듣고 있는 '정 경사'가 궁금한 모양이다.

"근데 양말 벗으라고 할 때 거부하거나 반발하지는 않았나요?"


"협조 잘하면 수갑은 안 채운다고 했거든, 수갑이 주는 부담이 컸던 모양이야."

"그건 지금도 그래요. 검거할 때 수갑 채우기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요"


얘기가 끝날 때쯤 도박 현장에 도착했다.


순찰차에서 서류가방을 챙기며 내리는 '정 경사'가 내게 한마디 했다.

"오늘은 팀장님이 비질란테 한 번 하시지요!"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어. 그렇게 못 해."


현장은 작은 아파트 1층이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인기척이 없다.


정 경사는 아파트 뒤편으로 향했고 나는 화단으로 연결된 베란다 창문을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창문 뛰어넘는 아주머니 신병 확보!"

정 경사의 무전이 들렸다.


나는 잠겨 있지 않은 베란다 창문을 통해 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각 방을 살펴보던 중 작은방에 놀란 토끼처럼 모여 있던 5,60대 아주머니들을 발견했다.


"우린 그냥 친구들인데 놀러 온 거예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근데 친구분은 왜 창문으로 도망쳤을까요?"

"..........."

"자 여사님들! 이쯤 되면 빼박이니 빨리 처리하고 귀가하시게요!"


잠시 침묵.


"그래 우리가 뭐 죽을죄 진 것도 아니고 탕수육에 빼갈 내기한 거 가지고, 빨리 하고 집에 가자. 쪽팔리다"

용감하게 한 여인이 시인을 하자 다들 그렇게 하자는 분위기로 흘렀다.


그때와 다르다. 일 처리를 빨리 한다고 양말에 판돈을 담고 지구대로 데려갈 수 없는 노릇이다.

압수물 확인, 조서 작성, 압수물 목록 교부 등 절차를 거친 후에야 현장 마무리가 되었다.


현장을 빠져나와 순찰차 시동 버튼을 누르는 정 경사 한마디.


"팀장님 저 안에 여사님들 대부분 양말을 신지 않았던데요!"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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