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차 경찰관의 기록>
<이 글은 현직 경찰관이 지구대 근무 중 겪은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팀장님! 배금수 씨가 다시 부산으로 간다는데요!"
아침 근무 교대를 마친 후 커피머신에서 아메리카노를 뽑고 있던 박 경위가 말했다.
"어? 언제?"
"이번 겨울에 간다고요. 짐 정리되는 대로."
배금수. 1년 전 겨울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지구대를 찾아온 50대 남자였다.
처음 본 건 작년 초겨울이었다.
음주운전으로 적발됐을 때였다.
50대 중반, 경상도 말씨, 키 175에 다부진 체격. 포터 트럭을 몰고 다녔다.
그때는 몰랐다. 그가 단골이 될 줄은.
첫 고소장은 음주운전 신고자를 고소하는 것이었다.
"편의점 사장이 신고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저한테 모욕을 줬심더."
"배금수 씨, 그건 억측이고요. 고소하시면 무혐의 나올 겁니다."
"그래도 써야겠심더."
그날 이후 배금수는 일주일에 두 번씩 지구대를 찾았다.
지구대 탁자를 찾아 스스럼없이 앉더니 주머니에서 모나미 볼펜을 꺼낸다.
박 순경으로부터 건네받은 고소장 양식을 책상에 두 번 '탁탁' 치더니 적기 시작한다.
도움이 없어도 막힘이 없다.
간혹 생각해야 할 때가 있으면 전방을 바라보며 적절한 표현을 중얼거린다.
고소 사건은 다양했다.
차량 운전자와 다툼, 처음 본 사람과 밤새 술 마시고 싸운 후 고소,
취직한 첫날 두 시간 일하고 일당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업주 고소.
하루는 아침 일찍 술에 취해 찾아왔다.
"배금수 씨,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드셨어요?"
"아 팀장님! 안녕하십니꺼!"
"오늘은 무슨 일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습니꺼?"
어제 만난 사람이 거짓말을 했다며 고소장을 썼다.
"그런 걸로 고소를..."
"그놈이 제 어머니까지 들먹였심더."
배금수는 진지했다.
한 일주일간 보이지 않더니 다시 지구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머리 스타일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머리 밑부분은 면도질을 했는지 하얗고, 남겨진 윗머리는 뜯긴 듯 땜빵 머리였다.
"배금수 씨 이발했네요. 깔끔하네요!"
"좀 이상하게 보이지예. 그냥 제가 잘랐심더." 하며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쑥스러워할 때 보면 영락없는 동네 평범한 아저씨였다.
"미용실에라도 가지."
"돈이 없어서예. 그래도 괜찮지예?"
오늘도 난폭운전자에게 위협당했다는 내용의 고소를 힘차게 내려쓰고 있었다.
한 번은 커피를 건넸다.
"고맙습니더."
배금수는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겨울이었다.
"배금수 씨는 부산 사람이에요?"
"예. 고향이 부산입니더."
"가족은?"
"... 다 부산에 있심더."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커피만 천천히 마셨다.
면허 취소가 확정되면서 포터 트럭도 처분한 모양이었다.
"이제 차도 없심더. 면허도 안 딸라고예."
차가 없어진 이후 고소는 더 잦아졌다.
한 번은 고소인 자격으로 경찰서에 갔다 온 적 있느냐고 물었다.
배금수는 여러 번 경찰서 다녀왔고 경찰서 조사관 이름도 줄줄이 나열했다.
"그 많은 사건들 언제 마무리할 건데요! 좀 쉬어가야 되지 않을까요?"
나는 넌지시 고소 자제의 뜻을 비췄다.
"안 그래도 절반 정도는 취하했심더!"
"그럴 거면 처음부터 고소하지 말 걸 그랬네."
그는 "세상 살면서 순리대로 되는 게 있습니꺼! 봐줄 건 봐줘야 지예!"라고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고소장을 써 내려갔다.
어느 날 고소장을 써 내려가는 그에게 물었다.
"배금수 씨,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하셨겠어요. 글빨이 장난 아닌데요!"
"믿지 않겠지만 저 연합고사에서 만점 받았심더. 친구 중에는 우리나라 대형 로펌 대표변호사도 있고예."
옆에 있던 직원들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지금이 초겨울이니 딱 1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경찰 입장에서는 귀찮은 민원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배금수는 경찰에 악의를 갖지도 않았고 공격적이지도 않았다.
이야기를 걸어주면 곧잘 대답도 했고 커피 한 잔 제의에는 언제나 흔쾌히 응했다.
정말로 박 경위의 말 이후부터는 한 번도 지구대에 오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마지막 인사라도 왔으면 하는 마음도 들었다.
'정말로 간 것 같다.'
어쩌면 사람이 그리워서, 한마디라도 하고 싶어서 지구대를 찾은 건 아니었을까.
쑥스러워서 그냥 "커피 한 잔 주세요"라고도 못하는 사람.
지구대를 찾는 사람들은 다 이유가 있고,
그 이유를 찾아 해결해 줘야 하는 게 우리의 책무이긴 한데 간혹 헛다리 짚을 때도 있다.
"배금수 씨, 그래도 내가 건넨 커피 한 잔으로 퉁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