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혜 Oct 13. 2022

시골 할머니의 단술





 어릴 때부터 나는 외할머니를 시골 할머니라 불렀다. 할머니가 둘인 게 도저히 이해가 안 됐던 아이에게 두 할머니를 구분시키기 위한 엄마 아빠의 설명이 굳어진 것이었다. 시골에 사시는 할머니가 외할머니, 신천동에 사시는 할머니가 친할머니.


 설명은 좋았으나 부작용이 있었는데, 뭘 잘 몰랐던 아이는 할머니들을 부를 때도 '시골 할머니, 신천동 할머니'하고 그대로 불렀던 것이었다. 애가 계속 그러니 듣다 못한 '신천동 할머니'가 한 마디 하셨고 그렇게 두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로 불릴 수 있게 되었다.






 시골 할머니 집은 창녕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차로 한 시간 정도가 걸리는 곳이었는데, 어린 나는 그 한 시간이 너무 길게 느껴져 힘들었다. 엄마 아빠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날이면 차에서 노래도 부르고 어찌어찌 시간을 때웠는데, 엄마 아빠가 냉전인 날에는 그보다 더한 고역이 없었다. 눈칫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차에서 버티던 시간들 때문이었을까, 나는 시골 가는 길이 싫었다. 언젠가 시골 가기 싫다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엄마는 "너도 나중에 엄마 보러 가기 싫다는 딸 낳아봐라" 고 말했었다. 엄마 목소리가 슬프게 들려 그 뒤로는 비슷한 말을 꺼낸 기억이 없다.


 차에서 내리면 아주 잠깐 해방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아주 작은 언덕을 조금 올라가면 할머니 집 대문이 있었다. 할머니는 주로 문을 거치면 바로 보이는 대청마루에 계셨는데, 어느 날은 우물에서 물을 긷고 계셨고 어느 날은 대청마루에 앉아 뭔가를 다듬고 계셨다. 무엇이든 아주 바쁜 동작으로. 대문을 들어섰는데도 할머니가 보이지 않으면 밭에 나가 일을 하고 계신 것이었다. 나는 그 작은 육체에 어떤 강인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지 늘 궁금했다.


 할머니는 내가 본 사람 중 가장 부지런했다. 그녀가 척척 일을 쳐내는 빠른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경이로울 정도였다. 잠시라도 쉬면 어딘가 고장 나는 것 마냥 쉴 틈 없이 일을 했다. 파, 양파, 고추는 기본에, 들깨를 털고, 배추를 뽑고, 널어 말리고, 마늘 쫑을 뽑고, 마늘을 뽑고, 그 넓은 땅에서 매일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 함께 김장을 하자 약속을 잡아놓고 가도 김장을 같이 하는 일은 없었다. 한 두 포기도 아닌 배추를 몽땅 절이고 몸만한 대야에 양념을 만들고, 속을 치대고, 항상 그 전날 큰 일을 끝내놓고 우리를 맞았다. 엄마는 그런 할머니에게 '제발 좀 말 좀 들으라'며 한소리 하곤 했다.






 엄마는 9남매 중 뒤에서 두 번째였고, 나는 열 손가락으로도 다 셀 수 없는 할머니의 손주들 중 가장 어린 편에 속했다. 할머니와 나이 차가 너무 많이 나서, 알아듣기 힘들 만큼 거센 억양의 사투리를 구사해서 등의 이유로 나는 그녀가 어려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좋아하는 마음을 정확히 알 수 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것을 진즉 알았다. 우리 엄마가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나도 그녀가 싫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시골에 가는 날이면 단술을 만들어 놓곤 했다. 그때 단술이라 부르던 음료가 식혜인 줄은 나중에서야 알았다. 할머니의 단술은 음료와 거리가 멀었고, 밥알이 아주 많아서 밥숟가락으로 먹어야 했다. 국물만 먹다가 나중에는 밥알만 따로 먹어야 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어 나는 나름 철저히 계산한 비율로 단술을 퍼오곤 했다.


 온통 논과 밭, 산뿐인 시골은 당연히 흙 투성이었고, 나는 어린 마음에 늘 시골이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설거지를 해둔 식기도 어딘가 못 미더웠고, 그래서 나는 시골에서 무언가 먹는 걸 싫어했다. 하지만 단술은 늘 예외였다. 눈치 없이 깔끔 떠는 아이도 쉬이 굴복시킬 만한 맛이었다.


 달달한 국물에 푹 절여진 밥알을 가득 넣고 씹으면 입 안에 달달한 맛이 계속 퍼졌다. 달기만 한 맛이 아닌 감칠맛이 더해진 맛, 그 중독성에서 헤어 나올 수 없어 나는 대야에 가득한 단술을 국자로 몇 번씩 퍼와서 먹었다. 겨울에는 하룻밤만 밖에 두면 단술 윗부분이 꽁꽁 어는데, 국자로 얼음을 깨서 같이 먹으면 감히 어디 비할 데가 없는 맛이었다. 추운 겨울에 시골을 가면 나는 엄마한테 꼭 물어보곤 했다.


 "엄마 이 정도 날씨면 내일 단술 얼까??"


 볼살이 가득 차 땡그래서는 먹을 궁리밖에 없는 딸에게 엄마는 늘 고만 먹으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나는 굴하지 않는 꿋꿋함을 가진 아이였다. 손녀딸이 이렇게까지 잘 먹으니 할머니도 단술을 계속 만들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할머니는 단술을 만들어놓지 않으셨다. 못하신 것이 맞다. 당연히 엄마 아빠와 함께 시골을 따라가야만 했던 시절이 지나 나 또한 어느새 훌쩍 커 버렸다. 나는 아주 드물게 시골에 가게 되었고, 쉬시라고 해도 도저히 말을 듣지 않으시던 할머니는 반 강제로 누워서만 지내게 되었다.


 나의 세상은 점점 넓어졌으며, 그녀의 세상은 점점 좁아졌다. 내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새로운 것들을 접하는 동안 그녀는 누워서 TV를 보며 하루 온종일을 보내야만 했다. 어두운 밤 잠 못들 때 그녀는 혼자 어떤 생각을 할까. 그녀는 글을 몰라 TV 리모컨도 혼자 조작하지 못했었다. 24시간을 누워 있게 된 그녀에게 한 시간은 어느 정도의 단위일까. 나는 아주 가끔 그녀를 생각했다. 어린 나이에 시집 와 평생을 일한 여자. 그렇지 않아도 작은 키에 허리가 굽어 더 작아 보이던 사람. 그 작은 몸으로 9남매를 낳고 기르고 먹인 여성.


 나는 지금도 가끔 그때 그 단술이 생각난다. 이제 다시는 먹을 수 없을 맛임이 분명하다. 나를 위해 그만큼의 단술을 만들어 줄 사람도 다시 없을 것이다.


 장례식에서 가만히 앉아 영정사진을 들여다 보며, 그녀가 나처럼 이름으로 불릴 시대에 태어났다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정도의 근성과 집중력이면 어떤 방면으로든 이름 세 글자 정도 널리 떨칠 수 있었을 텐데. 그 날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이 아깝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엄마의 사랑하는 엄마. 그러니 나 또한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의 이름은 조문시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