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단(淑旦)
십여 년 전 그해 정기 인사가 있을 거라는 소식이 들렸다. 프린터에서 갓 나온 인사 명단이 책상 위에 놓였다. 종이 위로 잉크가 채 마르지 않았다. 출력된 종이는 따끈따끈했다. 누구의 이름이 있는지 훑어보다가 낯익은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내 이름 석 자였다. 간부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종이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숨이 가빠지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직원들이 눈치챌까 봐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어 명단을 들고 서둘러 사무실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그고 종이를 다시 펼쳐 이름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 한참 동안 화장실 안에 머물렀다. 밖에서 여럿이 문을 두드렸지만, 물을 서너 번 내리고서야 사무실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
직원들은 뜻밖이라는 반응이었다. “다른 부서로 간다더니 승진했네요”. “생각도 못 했는데, 그렇게 되었어요”. 얼마 전, 신설 업무를 추진하면서 인력 배정이 너무 적다는 의견을 냈다. 그 일로 미운털이 박혔다. 상사는 손으로 엑스 표를 그으며 “잘 보고 있는데 이제 땡이야 땡”이라고 말했다. 그때 마음속으로 당분간 승진이 어렵겠다는 생각에 한동안 기대감을 접은 상태였다. 심지어 사표를 내고 다른 길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종이 한 장이 이렇게 큰 울림으로 다가올 줄은 몰랐다. 오래 쌓인 체증이 한순간에 내려가는 듯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환호가 흘러나왔다. 사람은 기대하지 않은 일이 이루어질 때 더 크게 기뻐한다는 사실을 그날 배웠다. 참고 견디면 언젠가 진심이 전해지고, 노력은 절대 헛되지 않음을 배웠다. 평소 태도와 성실이 위기를 극복해 내는 든든한 보험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날 이후 일희일비하지 않고, ‘다 잘될 거야’라는 긍정적인 마음을 품게 되었다. 결과보다 과정을 바라보게 되었고, 작은 일에도 의미를 찾으려 애썼다. 생각의 변화는 중년의 삶을 지탱해 주는 큰 힘이 되었다. 시간이 흘러도 그날의 종이 한 장은 여전히 따뜻하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이름 석 자가 전해준 설렘은 지금도 내 안에서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