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단(淑旦)
저녁 설거지를 거들다 냉장고 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았다.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넓어진 이마와 많아진 흰머리.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았다. 무심코 아버지와 많이 닮았다는 말이 툭 튀어나왔다. 뜻밖에도 아내는 “욱하는 성격도 많이 닮았지.”라고 말했다. 얼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성격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닮음의 방향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의도와 달리 외모보다 내면이 더 닮았다고 했을까. 그 한마디가 내 안에서 오래 울렸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거실 에어컨 덮개를 씌우다 아내와 실랑이를 벌였다. 좀처럼 덮개를 씌울 수 없었다. 크기가 작아서 그렇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늘어나니 조금만 더 잡아당겨 보라고 고집을 피웠다. 몇 번의 시도에도 절반밖에 덮지 못했다. 그때 딸이 크기가 안 바르다고 결론을 내려 일단락되었다. 결국 덮개를 반품하기로 하고, 너비와 높이를 재서 새로 주문했다. 아내는 색깔로 집안 분위기를 먼저 봤고, 나는 치수에 비중을 두었다. 그 차이가 다툼의 이유였다.
장남인 나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떨어져 지낸 몇 해를 빼면 늘 함께였다. 맏며느리인 아내는 시집살이로 고생이 많았다. 평소 점잖으셨던 아버지 술을 참 좋아하셨다. 술 한잔하신 날은 목소리 톤이 많이 높아졌다. 야근으로 귀가가 늦어진 날에 아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었다고 한다. 대신 나는 술·담배를 멀리했다. 그러면 좀 다르다고 믿었는데, 어느새 나도 사소한 일에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아내가 말한 '욱'하는 성격은 내 안에도 있었다.
"자기는 아버님 닮았어요" 그 한마디는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았다. 닮는다는 건 피할 수 없는 유전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성격은 잘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심한다고 해도 불쑥 튀어나오는 본성을 어찌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가족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본성을 다스리는 일은 어쩌면 가족에 대한 가장 큰 배려일 것이다. 오늘도 나는 그 배려를 연습하며 살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