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때 묻은 수첩

by 숙단

숙단(淑旦)

나는 A4 용지보다 조금 작고, 인조가죽 커버에 탈부착이 가능한 수첩이야. 너와 처음 만난 건 서른 해 전, 공무원 생활 초창기였지. 그날부터 너는 나를 늘 곁에 두었어. 출근길에도, 출장지에서도, 한 손에 쥐고, 때로는 가방 깊숙이 넣고 다녔지.

잊을세라 늘 확인하고, 자리에 도착하면 날 펼쳐 메모했지. 일정과 회의, 수입과 지출, 은행 비밀번호까지 빠짐없이 적어 넣었잖아. 사소한 일이라도 빠뜨리지 않으려 애쓰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해. 어떤 날은 밤늦게까지 나를 펼친 채 한참을 들여다보곤 했지. 나는 단순한 기록장이 아니었어. 너의 하루를 함께 걷는 동반자이자, 말 없는 청취자였지.

정년을 앞두고 흔들리던 마음, 가족이 아파서 잠 못 이루던 밤, 너는 붉은 펜으로 너의 속내를 나에게 풀어놓았고, 나는 조용히 그 말들을 받아 적었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는 말하진 못했지만, 네가 그런 위로를 기대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어. 한 줄 한 줄 적어가는 동안, 너는 너의 감정을 정리하고, 내게 기대듯 안정을 찾아갔지.

매일 아침이면 나를 펼쳐 오늘을 설계하고, 밤이 되면 하루의 무게를 내려놓았지. 꼭 치매 예방 때문만은 아니었잖아. 오늘이라는 시간을 붙잡고 싶었던 너, 그래서 하루하루 더 치밀하게 살아낸 너를 나는 기억해. 그렇게 쌓인 기록이 어느새 서른 권이 넘었고, 단 한 권도 너는 버리지 않았어.

이사할 때마다 짐이 무겁다 투덜거리면서도, 나를 박스 맨 위에 올려놓곤 했지. 가끔 꺼내 펼치면, 잊고 있던 시간이 손끝에서 다시 살아나지? 그 시절의 날씨, 기분, 네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문득 떠오를 때가 있잖아. 작은 메모 하나가 너에게 어떤 위로가 되었는지 나는 알고 있어.

나는 너의 웃음과 눈물, 희망과 후회를 모두 담고 있어. 어느 날 갑자기 휘갈긴 글씨 하나, 눌러쓴 숫자 하나까지도 너의 흔적이자 감정이었어. 그러니 나는 단순한 수첩이 아니야. 너의 삶을 고스란히 새겨놓은 또 하나의 너지.

그런데 말이야, 세상은 참 많이 변했어. 이제 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도 일정을 관리하고, 기록을 남기지. 종이 위에 쓰던 시간이 점점 줄고 있는 걸, 나도 알고 있어. 요즘엔 나를 펼치는 시간이 부쩍 줄었잖아. 문득 나를 찾을 때면 어색한 듯 웃으며 한참을 들여다보지.

처음엔 조금 서운했어. 하지만 이제는 이해해. 새로운 방식이 너에게 더 편리하고 유용하다는 걸. 그래서 난 이제 곁에 살짝 물러서 있으려 해. 꼭 필요한 날에만, 조용히 돌아와 줘. 나는 그걸로 충분해.

나는 여전히 네 손길을 기다릴 거야. 언젠가 다시 글씨를 적고 싶은 날, 그때 내가 너의 곁에 있기를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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