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의 층계를 밟듯
- 연암도서관에 오르다

by 벼리

지혜로 이르는 길이 쉽지 않은 것처럼 도서관으로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146개의 층계를 하나씩 밟으며 언덕 위 푸른 지붕의 연암도서관으로 올라갔다. 도서관을 오르는 길, 나무들은 여름 그 뜨거움을 내려놓기 위해 가을을 붉게 피워내고 있었다. 축축한 물기를 내면으로 동여매며 이제 열기를 버려야 한다는 지혜를 나무도 깨달은 터였다. 나는 그늘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시원한 선학산 산바람을 가슴 깊이 담았다.

도서관 안은 일요일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1층 탁 트인 로비를 지나 2층으로 올라갔다. 중앙에 책장이 줄을 지어 있었고, 남쪽 창 아래 열람석이 있었다. 책장 사이 사이로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는 쇼파에 깊숙하게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과 열람석에서 한 꼭지의 지혜를 얻어가고야 말겠다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책을 읽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독서 모임에서 읽을 책과 참고 도서 대 여섯 권과 시집 한 권을 책장에서 뽑았다. 그러는 동안 사람들의 숨소리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자잘하게 들렸다. 도서관 특유의 이 소음이 어릴 적부터 참 좋았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무언지 모를 뿌듯함이 차올랐던 경험이 있다. 지금도 그 느낌은 여전하다.

마침 창가에 자리가 있었다. 창이 열린 곳마다 깊숙이 들어오는 가을 햇살이 풍성했다. 책상 위 반짝반짝 빛나는 문장은 햇살로 더 아름답고, 어른어른 대며 들어서는 마른 풀 향이 펼쳐 놓은 책 위에 가라앉았다. 문장 틈에 배인 향내가 가을을 피워 올렸다. 이곳에서 누구는 노트북에 무언가 글을 쓰고, 누구는 고개를 숙여 책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벽이라는 경계를 허물고 자연과 하나 된 창가에서 시집을 읽었다. 시인은 말했다. “한 손으로 쥘 수 없는 빛이 네 머리 위로 내려앉고 있었다.”라며. 시인은 머리 위를 비추는 햇볕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박한 언어로 주는 감동이 진했다.

그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소설책 두어 권을 빌리려고 1층으로 내려가려던 길이었다.

그녀는 독서에 빠져 글자 사이사이 호흡으로 생을 그으며 읽고 있었다. 중요한 맥락을 짚어냈던 모양이었다. 한시도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길래 뭔가 중요한 게 있나 싶어 궁금한 내가 조용히 등을 두드려 보았다. 그녀는 분홍 모자를 접어 고운 이마를 드러낸 모습이었다. 환한 달빛같이 웃었다. 그녀는 나와 오랜 지인이었다. ‘건강에 좋지 않다고 먹지 못하게 하는 라면을 몰래 먹다 들키기도 하는 웬수님’이라 부르는 그녀의 남편과 함께 있었다. 그 남편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그녀 남편과는 초면이 아니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우산을 준비하지 못한 어느 날이었다. 일을 끝내고 오후 사무실 입구에서 그녀는 남편이 가지고 온 우산을 내게 건넸다. 그때 그는 그녀를 마중 나온 길이었다. 그녀는 괜찮다는 내게 우산을 건네고 남편의 우산 안으로 들어갔었다.

일요일의 도서관은 오후 5시에 문을 닫는다. 나는 1층에서 소설책 두 권을 빌려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햇빛은 아직 찬란했고 하늘은 푸르렀다. 산마루에 있는 연암도서관 층계에서 내려다보이는 남강은 망경산의 거뭇한 그림자를 담은 채 진주라는 소도시를 반짝거리게 했다.

도서관 아래로 내려와 도로에 주차해 두었던 차를 돌리기 위해 선학산 골짜기 청락원 쪽으로 갔다. 그때 문득, 산마루를 오르는 그 부부가 보였다. 아, 부부는 초전동 집에서 도서관까지 선학산 둘레길을 돌아 걸어왔다가 책을 읽고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앞에서 끌고 뒤를 이어 오르고 있는 부부. 그녀의 분홍빛 모자가 출렁거렸다. 그 출렁이는 모자를 보자 조선 후기 실학자 연암이 느꼈을, 연경에서 열하까지 신문물에 대한 충만과 환희를 안고 조선으로 돌아오던 그 마음이 떠올랐다. 선학산 둘레길을 돌아 도서관으로 오며 가며 쌓았을 그 추억들이 살다살다 그 부부에게 얼마나 약이 되었을까를 생각하니 뭉클해졌다.

일요일 도서관 만남 이후 그녀와 그 남편의 모습이 내게 감동을 주었다고 말했더니 그녀는 말했다. “ 우리 이젠 알콩달콩 살기로 했어요.” 오랜 숙성 시간으로 얻은 지혜를 실천하는 그 부부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연암도서관은 단순한 지식 창고가 아니었다. 결이 고운 사람들의 따뜻한 이야기로 가슴이 데워지는 그런 곳이었다. 연암도서관이 더 다정하게 느껴졌다.


연암도서관의 ‘연암’은 향토 출신 기업가 고 연암 구인회의 호이다. 나는 ‘열하일기’의 저자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의 호 ‘연암’을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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