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애'란 보통 가장 애정하는 대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고 싶은 최애는 안타까움과 연민과 감정이입으로 오래 마음에 남는 인물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 남아 있는 나날'의 주인공, 스티븐스다.
스티븐스는 평생 영국 귀족 가문의 집에서 집사로 일하다 가문이 망하자 저택과 함께 일괄 거래에 끼인 품목으로 미국 부자에게 팔린다.
스티븐스는 평생 주인의 명예와 체면을 자신의 삶보다 앞에 두었고, 집사로서의 품위를 지키는 일을 삶의 전부로 살아왔다. 대영제국의 백작을 모셨다는 사실은 그의 자부심이다. 그의 자부심은 완고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과 인간 관계를 끊임없이 억눌렀다. 집사로서 자신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한 여자를 사랑했던 감정조차 억눌렀다. 그로인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한 채 여자와 헤어졌고, 세월은 스티븐스를 늙게했다.
미국 주인에게 휴가를 얻은 스티븐스는 한때 사랑했던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하지만 오랫동안 품위라는 이름으로 감정을 봉인한 그는 사랑했던 여자를 만났지만 애뜻한 마음과 달리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행복하게 잘 살라는 말만 남긴 채 돌아선다.
돌아오던 길에서 스티븐스는 어떤 노인을 만난다. 스티븐스는 노인과 저녁놀을 보며 대화를 나눈다.
"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펴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스티븐스가 대답한다.
"지당한 말씀인 것 같소."
이 짧은 대화는 이 소설의 주제를 함축한다. 겉으로 스티븐스는 노인의 말에 동의한다. 그는 평생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노인의 말은 옳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복잡하고 아프다. 그는 평생 즐기는 법을 몰랐다. 귀족을 위해 봉사하고 품위를 지키고 감정을 억누르는 법만 배웠다. 즐기라는 말은 스티븐스에게 너무 늦은 조언이었다.
스티븐스는 사랑을 놓쳤고, 자기 삶을 살지 못했다. 노인에게 '지당하신 말씀'이라는 동의에는 후회와 슬픔과 깨달음이 함의되어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스티븐스가 지켜왔던 품위 뒤로 숨긴 외로움이 전해졌다. 집사라는 책무를 잘하기 위해 놓치게 된 사랑과 잃어버린 자신의 삶, 아쉽게 지나가버린 선택과 기회의 시간들, 스티븐스가 느낀 감정은 상실과 외로움이다.
억눌렀던 감정, 자기기만의 삶을 살았던 스티븐스를 보며 나에게도 질문을 해 본다. 나 역시 사회적 역할과 책무를 위해 억누르거나 숨겨왔던 감정들이 있었는가. 부정할 수 없다. '남아 있는 나날들'은 한 집사의 이야기지만 사회적 책무로 자신의 삶을 살아오지 못한 나에게 던지는 질문같았다. 육십 고개를 넘긴 내게는 얼마의 시간이 남았을까. 나를 위해 이제는 즐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