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마

by 벼리

도마 앞에서는 누구나 고개를 숙이게 된다. 손을 정갈하게 씻고 칼을 들고 도마 앞에 선다. 음식이 될 재료를 도마 위에 가지런히 올려 놓는다. 재료를 자르는 일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가능하다. 이런 자세는 굴복이 아니라 끼니를 장만하기 위해 몸을 낮추는 방식이다.

도마는 왜 낮은 자리에 있을까. 중요한 일들은 대개, 몸을 굽혀야 손이 정확해진다. 칼이 앞에 서고 도마는 아래에서 하루를 받친다. 잠시라도 방심하면 손을 베여 기분을 상하게 하니, 도마 위에서 준비하는 하루는 집중을 요해야 한다.


도마 위에 놓인 재료는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재료에는 뜨거운 햇볕과 달콤한 비와 기다림의 순간들이 담겨 있다. 도마 위에서 재료를 썬다는 일은 사물을 자르는 일이 아니다. ‘햇볕과 비와 바람’을 이긴 ‘농축된 시간’을 다루는 일이다. 그렇게 시간을 써는 순간을 도마는 톡톡톡, 탁탁탁 조용하게 받아낸다.


이렇게 도마는 칼이 지나간 자리를 수용하고 지탱한다. 젊은 날의 시간이 칼에 가깝다면 도마는 노년의 삶에 가깝다. 빠르게 지나간 시간을 받아내고 견딘 흔적이 도마 위에 많이 새겨질수록, 그 주름같은 자국에는 한 생이 끝까지 받아낸 시간이 기록된다.


도마는 오늘도 낮은 자리에 놓여 있다. 그 자리는 밀려난 자리가 아니라 많은 시간을 받아낸 자리다. 도마 앞에서 고개를 숙이게 되는 것은, 그 낮음이 하루를 떠받치는 높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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