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 이 말에는 두 개의 층위가 묶여 있다. 하나는 연대기적 시간의 배열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시간이다. 전자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직선적 흐름이며, 사건과 연도를 기준으로 배열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외부의 기준에 따라 정렬되는 객관적 시간이다. 반면에 기억의 시간은 과거의 개인 체험이 현재의 시선으로 재배열되어 짜깁기된다. 그래서 기억은 주관적이다. 어떤 세월은 순식간에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시간은 오래 머무른다. 체험의 밀도에 따라 배열되기에 의미가 우선이다. 그래서 기억은 사건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기억은 진실을 복원하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구성하는 일에 가깝다.
오래 전에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 동창회에 간 적이 있다. 옆집에 살던 친구를 만나 당시의 기억을 회고했다. 연탄 가스 냄새가 나던 어두운 골목, 좁은 골목 사이로 창문과 방문이 서로 마주보며 줄지어 이어지던 좁은 집들, 아이가 우는 소리, 술 취한 아저씨와 여자의 악다구니 소리, 골목을 지날 때마다 들리던 한숨과 절망의 소리들, 그럼에도 우리는 딱지치기를 하고 고무줄 놀이로 골목을 밝게 만들었다. 나는 친구에게 ‘정’이 있었던 그 시절이 행복했다고 말했고, 친구는 그 시절의 가난이 지긋지긋했다고 떠올렸다. 같은 사건이었지만 우리는 감정의 높낮이가 달랐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왜 서로 다르게 기억할까. 나는 그 골목을 떠올릴 때마다 연탄 냄새와 악다구니보다는 고무줄 놀이를 먼저 꺼낸다. 아이의 울음소리와 술주정을 뒤로 밀어내고 ‘정’을 앞세운다. 나는 어쩌면 그 골목의 가난을 용서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가난은 물질적 경험이지만, 동시에 관계적 경험이기도 하다. 그 시절이 결핍이나 수치보다 더 그리운 시절로 남아있는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골목으로 들어오던 아버지의 자전거 소리, 아버지가 부르던 ‘울고 넘는 박달재’와 휘파람 소리, 학교에서 돌아와 먹던 술빵의 단내, 저녁밥 때가 되면 골목마다 울려 퍼지던 아이들 이름, 집집마다 불리던 이름들. 그 소리와 냄새가 있었기에 나는 가난을 미워하지 못한다. 가난보다 사랑이 그 위에 오래도록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보다 사랑을 먼저 꺼내 놓으며 나를 설명해 왔다. 그러나 결핍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타인의 결핍 앞에서 마음이 지나치게 기울 때, 나는 그 골목의 냄새와 소리를 떠올린다. 사랑으로 눌러 두었던 기억이 공감으로 다가온다. 떠난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기억은 다른 모습으로 나를 안은 채 살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