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이 글제를 적어 놓고 ‘싸우고 있다’라는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투쟁적인 어감이 주는 결연함이 어쩌면 내 삶의 전반을 덮고 있는 말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사기군에게 속아 전재산을 다 날린 뒤, 가난은 나를 세상과 대적하게 만들었다. 어느 집의 단칸방에서 살던 여덟 살 나는 주인집 아이와 나이가 같았다. 빨간 색연필로 100점 받은 받아쓰기 종이를 태극기 날리 듯 들고 엄마에게 달려갔다. 주인집 아이는 한글을 몰랐다.
나의 싸움은 그런 식이었다. 잘하는 것, 앞서는 것, 증명하는 것 그것만이 가난이라는 날것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다. 학교는 전쟁터였다. 시험지를 받아들고 점수를 확인하는 순간, 안도하곤 했다. 그 안도는 기쁨이라기보다 승리감이었다. 성적표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군인의 생존 증명서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것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결핍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쉬지 않고 그 허기를 채우기 위해 뛰었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 자리로 돌아가거나, 숨기려 애썼던 결핍이 드러날 것 같았다. 나는 강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알아주지 않을까봐 두려움에 떨던 아이였다.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묻는다. 그때 내가 정말 이기고 싶은 상대는 누구였을까. 주인집 아이였을까. 내 안에 자리잡고 있는 ‘가난하고 못난 아이라는 열등감’이라는 목소리였을까.
이제야 나는 안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는 그 결핍을 줄이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더 많이 배우고, 더 강한 척을 한다는 것을. 상처를 감추는 방식은 다르지만 근원은 비슷하다는 것을. 그것이 두려움이라는 것을.
인정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쓸모 없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 백 점짜리 받아쓰기를 들고 달리던 아이는 공부를 잘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엄마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 눈빛을 통해 ‘너는 괜찮은 아이야’를 확인 받고 싶었다. 엄마의 고개 끄덕임, 환한 웃음, 그 인정으로 나는 괜찮은 아이가 된 듯했다.
하지만 사실은 주인집 아이보다 더 위에 서려는 속셈이었다. 나는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였다.
나는 그 싸움을 과거형으로 둔다. 이제 나를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결핍은 애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채우지 않으려 할 때 보이지 않는다. 열등감이 문득 고개를 들때면, 나는 멈추어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지금으로 충분하다고. 떨지 않아도 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