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 정리를 하다가 눈에 띈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다가, 독서노트도 썼다.
2015년에 나온 책이라, 그때 한 번 읽었고, 부분 부분을 더 읽었었다. 여러 페이지에 써놓은 메모를 보면서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본다.
나는 저 목차의 4, 5번에 마음이 갔다.
5번의 <누구나 마지막까지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싶어하~>지만, 도움을 준다고 개입한 치료가 환자가 생각한 가치 있는 삶을 방해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다.
아기가 세상에 올 때, 산도를 통과하며 안간힘을 쓰듯이 마지막 순간의 도움도, 의학적 판단이 아니라 인간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 판단이 지극히 어렵지만, 우리가 평소에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이유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라고 한다. 우리는 예부터 죽음을 더러운, 말하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밥상 앞에서 자식들에게 '죽음'을 이야기하는 집은 얼마나 될까. 죽음을 적극적으로 가르쳐야 각자에 게 주어진 삶을 알차게 산다. 삶은 즉흥극이다.
나는 아이들에게 어릴 적부터 '죽음교육'을 했다.
요즘엔 이전보다 평소에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아졌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에는 죽음을 공공의 시간에 말하는 건 재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렇다고 죽음을 가까이서 안 본 것도 아니다. 죽음이 병원에서 이뤄지는 어떤 형식이 되기 전에는 노인들이나 집에서 갑작스러운 돌연사와 맞닥뜨릴 때가 많았지만, 언젠가부터 죽음은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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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죽음을 대하는 방식 은 한 나라의 경제성장과 궤를 같이 한다.
"학자들은 한 나라의 경제가 성장하면 의학도
세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데.
1) 첫 번째 단계는 나라 전체가 극도로 빈곤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서 죽음을 맞는다.(전문적인 진단과 치료를 받을 수 없다)
2) 두 번째 단계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늘어나서 의료서비스가 늘어난다.(집보다 병원에서 임종을 많이 한다.)
3) 세 번째 단계는 나라의 소득이 가장 높아져서
삶의 질을 생각하게 된다.(삶의 질에 대한 고려는 몸이 아플 때도 이어지며, 집에서 임종을 맞는 경우가 많아진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pp 295 ~296.
조금만 아파도 병원만 찾게 만드는데, 위의 경우가 우리 현실에서는 예외임을 안다. 나는 한동안 복지관 등에서 '웰다잉' 강의를 했었다. 그 자리에
서기까지 들인 시간은 정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묻는 시간이었다. 그랬던지, 강의를 들은 많은 사람들이 죽는 게 아닌, 잘 살아야 하는 걸 강조하는 게 아닌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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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살아야 잘 죽는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대하는 태도다.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오빠가 10년 전에 사별하고
거의 6 년을 문을 닫고 살았었다. 오빠가 청하면 주저 없이 달려갔지만,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오빠는 세 살때부터 살던 집에서 혼자가 되기까지
오랜 시간을 거한 집에서 고독과 무너짐과 원망을
이겨내었다. 그리고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할 때는
내 일인 양 도와주었다. 오빠는 독거노인이지만, 추레하지 않다. 서울에 사는 딸이 오면 아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데,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생은 가끔 찡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며칠 전에 남편과 나, 오빠는 올케 언니가 돌아가 시고는 한 번도 가지 않던 샤부샤부 집엘 갔었다. 효자인 아들도 예쁜 딸도 멀리 있어 혼자라 오고 싶어도 올 수 없었다는 말에, 사장님께 말씀드렸 더니 언제든 오셔도 된다는 말이 고마웠다.
그 집은 야채를 무한정 먹을 수 있어, 오빠에게 좋은 곳 아닌가.
작지만,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 망설이는 걸 할 수 있게 도움을 주는 것도 웰다잉이다.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독서 노트 쓰기에도, 삶의 순간순간에도
커다란 울림을 준 冊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