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엄마는 그렇게 고향을 떠났다.
외할아버지는 큰 한약방을 했다고 했다.
엄마는 일찍 대처로 떠난 두 언니와 두 오빠가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위기를 느꼈던지 셋째 딸은 학교도 보내지 않고 한약방과 살림에 네 살 어린 여동생까지 맡겼다.
엄마가 처음부터 살림을 한 건 아니고, 약방에 약초를 가져오는 분들을 대하는 태도와 약초에 대한 지식과 총명함이 엄마를 힘들게 했다는 생각이 든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도 성에 차질 않았다니 그것도 엄마의 성정 탓이리라.
외할머니는 여럿 자식을 낳은 후 늦게 낳은 막내가 힘겨웠던지, 막내 이모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다고 했다. 엄마는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덕망 높은 한약방의 안살림을 톡톡히 해낼 재간과 강단이 있었다. 그런 엄마가 오빠들 등너머로 뭐든 배우려 하면 기다란 곰방대나 대저울로 벽을 탕탕 쳤다니, 듣던 외손녀는 부르르 떨었다.
때는 일제강점기였다. 엄마는 외할아버지가 정혼한 댁의 혼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청년들이 전장으로 끌려가던 때였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던 청년과 처녀들을 데려가던 전쟁막바지에 마음에도 없던 '양반집 아들'이라고 결혼한 남편은 일찍 부모를 여읜 데다 소작농이었다. 거기다 풍류가 넘쳐났던 청년이라니, 결혼 조건으로는 최악이었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얼마 후에 징용을 당했다.
엄마는 그때부터 길쌈을 배워 동네 노인들과 시간을 보냈다. 해방이 되고, 떠났던 마을 청년들이 돌아올 줄 모르던 그 길에 '아버지'가 거지 행색으로 돌아왔다. 동토의 땅, 사할린에서.
바보 흉내로 살아남은 아버지는 이빨도 살도 다 빠진 모습으로 고향에 왔으나, 먹고살 길은 막막했다. 그리고 나의 언니와 오빠가 태어나고, 징용에서 살아 돌아와 가정을 꾸려도 놀부 같은 형은 동생이 버거웠고, 아버지는 고향 마을에서 생겨난 오광대놀이에 푹 빠졌다.
그때, 부산에 살던 엄마의 형제들이 엄마에게 손을 내밀었다. 땅이 없어도 하루하루 벌어먹기는 도시가 낫다고. 엄마는 두 아이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도시의 빈민살이가 나을 거라는 판단에 날개옷도 없이 고향을 떠났다.
한참을 망설이던 아버지는 고향에 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