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은 늘고, 갈등은 깊어가고

ㅡ 엄마는 아이가 다섯

by 민교

엄마는 아버지가 오시고, 딸 셋을 더 낳았다.

엄마는 장사가 힘들고 곤궁한 생활에도 아이 다섯을 잉태한 그대로 낳아 길렀다. 그땐 피임도 없던 데다, 영아사망률이 높아서 반타작이라는 말이 있었으니까. 열 명을 낳으면 다섯이나 여섯, 아니면 셋만 키우기도 했다. 뒷집 송미집은 열 명을 낳아서 네 명만 자랐다. 송미 엄마는 40대 초반에 아저씨가 돌아가신 뒤, 남편이 보고 싶을 때마다 죽은 아이들은 다 아들이었다고 넋두리를 했다. 만큼 남아 사망률이 높은 때에, 하나 아들이어도 똑똑한 아들은 엄마의 자랑이었다.



엄마는 삶에 최선을 다했으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김장을 7,80 포기나 100 포기씩 하는 때라 겨울엔 몇 끼를 굶을 때가 많았다. 아이도 한 그릇, 어른도 한 그릇이라는 멀건 죽을 나는 참 싫어했다. 죽을 안 먹을 거라고 다른 방으로 뛰어가다가 이마를 다치기도 했지만, 매일 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12월이 생일이라 네 살인지, 다섯 살인지 구분도 안 되는 어느 날이었다. 해가 지려면 한참 남았는데, 엄마가 와서 내 베개를 마당에 가지고 갔다. 커다란 함지박에 쏟은 것은 좁쌀이었고, 그날은 내 생일이라고 했다. 그 저녁상은 '후루룩' 마시는 소리 한 번에 멈추었고, 엄마 생신도 나흘 뒤였다. 아버지는 죽 그릇을 오빠 쪽으로 밀어놓고는 작은 방으로 가셨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었다.



봄은 더디게 왔고, 아버지는 엄마 일을 돕는 간간이

자갈치나 국제시장에서 지게를 졌다. 때론 벌이가

있는 날도 있었으나, 지게를 지는 사람이 많아졌다.

큰언니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근처 실공장에

취직했지만, 제때 월급을 안 준다고 언니는 화를

많이 냈다. 그럼에도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친척의 자식들은 부산에 뿌리를 내릴 때, 우리 집은 거쳐가는 곳이었다. 우리 집은 필요에 따라 늘어나는 고무였던지, 여러 사람이 거쳐갔다.



오빠가 중학교를 졸업했다. 이웃들은 엄마가 무리해서 오빠를 고등학교에 보낸다고 수근거렸 지만, 오빠의 꿈은 컸다.

오빠는 닥치는 대로 알바를 했고, 마루를 이용한 만화방도 열었다. 나는 그 틈에 한글을 익혔다. 둘째 언니는 집안 살림을 도맡았고, 집은 나름대로 질서가 잡혀갔다.



편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갈치 시장을 갔다 오다 충무동의 어느 학교 변소 앞에 지게를 세워두고 잠깐 갔다 온 사이에 지게를 도둑맞았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도록 지게를 찾아 헤매다가 온 아버지는 넋이 빠진 듯했다. 그렇다고 지게를 지고 변소를 갈 수도 없었는데, 아무튼 힘든 상황은 우리 집뿐 아니라 나라 전체에 한참을 머물렀다.



엄마의 깊어지는 시름에도 쉼 없이 시간은 흘렀고 나는 국민학생이 되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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