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절망 후에

ㅡ 엄마는 외로웠다

by 민교

작은 이모집의 오빠가 사법시험에 세 번째 떨어 졌다는 말을 들은 건, 내가 2학년이 될 때였다.



엄마는 이모집에 갈 때는 꼭 나를 데려갔는데, 이모가 기운 없이 하는 어떤 말이 귀에 콕 박혔다. 이종사촌 오빠는 시험에 떨어지자 밥도 잘 안 먹고 방에만 있다는 이야기를 하던 이모는 늘 무섭게 생각하던 얼굴이 아니었다. 엄마와 손을 꼭 잡고 울먹이면서 '살 맛이 안 난다.'라고 했었다. 이모는 우리 집에 야산을 맡아보라고 할 때도 만사가 귀찮은 듯한 얼굴이었다. 어쩌다 송미와 국수를 사러 가다 만나도 불러서 곶감이나 떡을 주셨는데, 언제부터 인사를 해도 '알았다'는 표정뿐이었다.



이모는 혼자되신 지 오래되었고, 대학에 다니다 중퇴한 큰언니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는 작은 언니도 다 마땅치가 않다고 했다. 그래서였을까. 이모는 오빠를 서울로 보내려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 많은 학비며, 방세를 어떻게 감당할 거냐면서. 지금도 힘든 마당에 하나 아들이라고 서울로 보내면 남은 식구들은 어떻게 살겠냐? 고 했지만, 동생이 아들의 학비를 위해서 더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다 이모 자신이 자식들에게 받은 서운함까지 더해졌으니까.



사실 작은 이모는 물심양면으로 우리 가족을 위해 애를 써왔기에, 엄마는 이모의 이야기에 흔들리고 있었다. 하나 아들은 남부럽지 않게 해 주겠다던 소망은 엄마에겐 고문이었다. 시장에서 오는 시간은 더 늦어졌고, 말수도 줄고, 오빠의 얼굴을 쳐다보질 못했다.



오빠는 원하던 서울의 대학에 걸렸지만. 등록은 하질 못했다. 몇 날을 울부짖다가 친구집에 갔다 오더니, 사흘 후부터 직장에 간다고 했다. 아버지는 오빠에게 정말 미안해하면서 얼굴을 똑바로 보질 못 했다. 이틀 동안 원 없이 놀고 오겠다더니, 출근하기 전날 기타를 들고 왔다.



오빠는 출근을 하고도 한동안 기타를 쳤다. 우리 집에는 기타 악보와 서양 여자가 그려진 레코드 판이 쌓여갔다. 작은 방을 오빠 방으로 만들면서 다락이 만들어졌고, 다락은 둘째 언니와 셋째 언니가 쓰기로 했다.



나도 숙제를 하려면 공간이 필요했다. 마루에 있는 앉은뱅이책상 위에는 커다란 창문이 있었다. 여름이면 내가 낮잠을 자던 곳이라 언니, 오빠의

책을 옮기고, 그 책상을 내 방이라고 정했다. 막내가 떼를 쓴다고 여겼던지 아무도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틀을 책상에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누군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그 특별함이 좋았다. 그랬는데, 엄마가 외상값 대신 받아온 염소가 벽지를 뜯어먹으려고 올라와 방해를 해서 이틀 만에 내 방도 없어졌다. 늦게 퇴근을 한 오빠가 그 수선스러움을 보고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다. 염소 들어내고 현관 좀 줄여서 방 하나 넣자."

고 했다.



오빠는 공고의 기계과를 나와 회사에서 조그만 기계는 자신이 만들어서 쓴다고 했다. 신임을 많이 얻었던지, 오빠 표정은 서서히 밝아졌다. 그때부터 엄마와 오빠는 조금씩 모은 돈으로 집을 고쳤다. 동네에서 제일 먼저 수도를 넣었고, 우리 가족만 가는 변소도 생겼다. 오빠는 실질적인 가장이 되었고, 아버지는 밭에서 무언가를 자꾸 그렸다.



셋째 언니는 중학교 마지막 시험 세대였다. 가고 싶은 학교의 경쟁은 치열했고, 집 가까이에는 국민학교가 많았다. 국제, 부평, 자갈치, 동대신 시장이 있던 곳이라 언니 또래가 많았다.



어릴 때 많이 아팠던 언니는 중학교 진학이 큰 목표였다. 가을이 왔고, 나는 짧은 다리로 체력 연습을 위해 뛰어가던 언니를 따라 신작로를 뛰었다. 100개가 넘는 계단에서 나는 발을 잘못 디뎌 몇 개의 계단을 구르다 계단참에 멈췄다. 피가 나고 아팠지만, 언니는 저만치 가고 있었다. 그래서였나. 한동안 무릎이 아팠다. 언니는 체력이 딸렸던지 원하는 중학교에 가질 못 했다. 2차로 간 중학교에는 부평시장이나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부모가 있는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조금씩 조금씩 형편이 나아지고 있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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