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딸들

ㅡ 나는 못냄이

by 민교

엄마는 다섯 자식 중, 딸이 넷이.


♤ 큰언니


엄마는 아버지의 징용으로 스물다섯에 첫딸을 낳았다. 큰언니는 엄마와 달리 자기주장이 강했다. 그때의 나라 사정이나 집안 형편과 달리 공부에 욕심이 많았다. 장사를 하는 엄마 대신 나를 키운다고 중학교에 못 갔던 언니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공장에 다니다 결혼을 했다. 공부에 재능이 있었던 큰언니는 살면서 힘든 시기가 오면 나 때문에 중학교를 못 서 힘들었다면서 두고두고 원망을 했다. 는 그때마다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오빠가 안정을 찾자, 동네 사람들은 우리 집을 근거도 없이 알부자라고 했다. 언니들은 중학교와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말을 잘 듣는 막내였고, 우리들의 벨에포크가 시작되었다.



♤ 둘째 언니


둘째 언니는 보수동 책방골목을 지나고 광복동을 지나서 시청 앞까지 진출했는데, 그곳엔 일본책이 많았다. 언니는 돈이 생기면 알록달록한 잡지를 사 왔다. 소설가가 되고 싶었던 언니는 책에서 본 옷을 참고해서 입는 멋쟁이였고, 음식을 잘했다. 먹성 좋은 우리를 위해 엄마가 밀가루 1포대를 사주시자, 우리는 훈련된 원팀으로 움직였다. 촉감놀이 하듯 반죽한 밀가루로 튀김도, 도나스도, 국수도, 야채 고로케도 '뚝딱' 만들었다. 셋째 언니는 열심히 보조를 하고, 발이 빨랐던 나는 바지런히 모자란 것들을 사 와야 했다. 그때 처음 알게 된 야채 고로케는 아주 맛이 있었는데, 공정은 까다로웠다. 셋째 언니가 다급하게

"언니, 타겠다. 도나스 뒤집어야 돼."

하자,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나뚜라. 뜨거우면 지가 뒤집어지겠지."

하던 둘째 언니의 말이라니. 도나스도 뜨거우면

돌아눕는다던 언니는 문학소녀였만, 밀가루를

바닥내는 데는 앞장을 섰다.



♧ 셋째 언니


셋째 언니는 자신을 별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고집은 있었다. 언니가 다니던 중학교는 국제시장 등지에서 장사하는 부모가 많았다. 그땐 귀하디 귀한 납작한 깡통에 든 땅콩잼을 짝지에게 얻어와서 조금 떠주고 혼자 야금야금 먹었다. 자신도 겨우 얻었다고 자랑을 많이 하면서. 얼마 후였다. 아버지가 부평동 어느 가게에서 불쏘시개로 쓸 지푸라기를 얻어왔다. 지푸라기를 걸상 뒤에 차곡차곡 쌓는데, 손에 잡힌 은 통조림 2 통이었다. 가끔 지푸라기나 등겨(벼의 속껍질) 속에 과일이나 유리그릇이 있기도 했다. 깡통은 깨끗했다. 셋째 언니는 흘끗 쳐다보다

"밤 통조림이네"

라고 했다. 그날 저녁을 먹고 어렵게 깡통을 땄다. 통조림은 달고 맛있었는데, 셋째 언니는 아무리 권해도 먹지 않고, 우리만 빤히 쳐다봤다. 작은 통조림 2통은 금방 바닥이 났고, 언니는 깡통을 노려보다가 멋쩍은 듯 웃었다. 사춘기가 시작되던 그때, 언니는 통조림을 먹으면 죽을 것 같았다나. 이후로 셋째 언니 겁쟁이라고 오랫동안 놀림을 당했다.



여름 오후, 가 오려는지 어슬어슬 추운 날이었다. 아침에 깻잎을 서 시장에 갈 때 따간 호박을 들고 마가 관문을 열었다.

"호박 썩둑썩둑 썰 정구지 넣은 수제비가 묵고 싶네."

하는 엄마 손에는 마당에서 꺾은 정구지가 있었다. 둘째 언니가 급하게 부엌으로 갔지만, 수제비를 끓여서 저녁으로 먹기에는 양이 적었다. 그때 셋째 언니가 부리나케 점방에서 사 온 밀가루는 포대에 든 밀가루 맛이 아니었다. 엄마는 '쯧' 하면서

"너거 셋이면 소도 한 마리 잡겠다. 얼마나 묵고 싶으면 그랬겠노."

하시는 말에는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우리는 아무 말도 못 했다. 츰 먹성을 줄이던 언니들은 마당에 나오지 않았다. 나는 걸상에 엉덩이를 겨우 걸친 채 짧은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아카시아 향기에 흠뻑 젖어 언니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았다.

그때,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이여.



♤ 나 못냄이


3학년이 되었다. 엄마 난전 가까이 옷 점방에는 예쁜 옷이 많았다. 노란색과 하얀색의 가로 줄무늬 나일론 티가 발을 붙들었다. 못 보던 무늬에다 선명한 색이 예뻤지만, 비싸보였다. 엄마는 깻잎을 묶느라 고개도 들지 못했다. 괜한 짜증이 나서 길을 건너 서부극장 앞까지 뛰어가다가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그 옷을 입은 걸 봤다. 엄마를 졸랐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비쌌다. 그때까지 언니들이 입던 거나, 언니 친구집에서 보낸 걸 입던 내가 처음으로 사달라고 한 옷이었. 엄마는 옷값에 얼굴빛이 변했다. 그 옷이 내 옷이 된 날, 언니들은 새로운 옷감을 만져보다가

"가시나 이거는, 뭔 복이 이리 많노."

하면서 자매는 틈이 조금씩 생겼다. 언니들이 없을 때 입던 그 옷은, 지금도 베스트 중의 베스트다.



열 살은 철이 없었다. 색연필이 다 부러져서 24색으로 하나 사고 싶다는 말을 하자, 엄마는 장사를 하러 가다 아카시 나무 앞에 서라고 했다.

그 무표정한 얼굴로.

"내가 아침마다 장사 갈 때, 이 낭게(나무의 경상도 방언)다 창시(창자)를 걸어놓고 간다. 그년들이 사지도 않을 배추를 뜨뜻한 손으로 주무르다 발딱 일어서면 속에서 이런 게 올라~~"

하며 말을 끝맺지 못했다. 정신이 퍼뜩 들었다. 엄마는 배추를 팔기 위해 온몸도 아팠지만, 마음도 상하면서 배추를 팔아야 했다. 거기다 외아들을 눌러 앉히기까지 했으니. 이후로 떼를 쓰지 않았다.

내가 나로 불리길 원하는 몸짓 외에는.



4학년이었다. 엄마는 나를 '못냄아' 고 불렀다. 예쁜이라는 이름의 예뻤던 엄마는 외롭고, 지치고, 힘들게 자신의 몫을 살아내야 했기에, 막내딸은 그렇게 살지 말라는 염원이었을까. 일요일이나 방학도 없이 깻잎을 따다 시장에 가도, 큰 새미에서 몸무게만큼의 물을 퍼서 낑낑거리며 당근을 씻어도 내 이름은 못냄이였다.



여름방학이었다. 지금은 아파트가 된 뒷밭의 무수 한 계단을 깻잎 소쿠리를 이고 시장에 가던 중이었 다. 무거운 소쿠리를 잠시 내려놓고, 진흙더미를 오가는 개미떼를 한참 봤다. 벼락처럼 머리를 치는 것은 '맨날 놀지도 못하고 깻잎을 따도, 조그만 손이 붇도록 당근을 씻어도 '나는 못냄이'라는 생각이었다. 소쿠리를 이고 집에 왔다. 사발 가득히 물을 마셔도 갈 데는 없었다. 밭에 가서 잘 보이지 않는 영도다리 쪽을다가 밭도 헤집다가 집에 오 니 난리가 났다. 동네 아지매가 전한 말은 '장거리가 없다. 깻잎 빨리 가온나' 였다.

둘째 언니가 걱정이 된 듯 쳐다봤지만, 나는 큰방과 작은 방 사이에 죽은 듯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엄마는 세 딸의 이름을 동시에 불렀다.



♤ 그리고 우리는


그런 시절이 갔다. 딸들은 자신의 꿈을 찾아 숲도 헤매고, 절망도 하고, 기뻐하가, 때로는 서로 안 볼 듯이 싸우기도 했다. 그럼에도 각자에게 주어진 자신의 몫을 살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우리 가족은 특유의 경상도 기질로 서로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이 엉겨서 마음과 다른 표현으로 뾰족하게 가시를 세웠다. 그리고 나이 들어가는 엄마, 아버지와 맞닥뜨려야 했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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