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작은 이모와 아버지가 떠나다
애도는 그런 것이다.
♧ 작은 이모
작은 이모집이 멀리 전포동으로 이사 간다는 말을 들은 건, 내가 3학년이 되고 얼마 지나서였다. 우리가 사는 곳은 산동네라도 중심지였는데, 이모가 이사 갈 곳은 이름도 못 들어본 곳이었다. 엄마는 장사를 마치고 나를 데리고 갈 곳이 없어졌고, 나이 드신 이모도 물 설고 낯선 동네는
쉽지 않으리.
4학년이 되고 몇 달이 지났다. 엄마는 부산에 살게 된 작은 외숙모와 가봤다던 이모집을 잘 찾지 못했다. 늦은 저녁, 버스를 타고 간 곳은 버스가 다니는 동네였다. 엄마는 대문을 들어서기 전,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지었다. 작은 이모는 어디가 아픈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엄마와 이모는 나란히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참 했다. 설핏 잠이 들었는데, 이모가
"미안하다."
는 말을 하자, 엄마는
"내가 복이 없어서 그렇지, 언니가 뭐 잘못했다고.
부산에 와서 언니 덕에 얼마나 잘 살았는데, 그런
소리 하지 마라."
하며, 서로를 끌어안았다. 속이 깊었던 작은 이모의 '미안하다.'는 말은 외할아버지가 약방으로 번 돈을 두 아들이 다 쓰고, 엄마가 고생한 것에 대한 위로였다. 엄마와 작은 이모는 일찍 세상을 떠난 큰 이모와 작은 이모는 얼굴도 잘 모르는 막내 이모를 말하다가 소리 내어 울었다. 한참 울던 작은 이모가
"우리가 시대를 잘 못 만나서 이 고생을 했다. 동생아, 니는 막내도 아직 어리니 맘 단단히 먹고
살아야 된다."
고 하셨다. 창밖이 희붐해지고,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와 나는 작은 이모가 차려주신 아침을 먹고 이모집을 나섰다.
엄마 걸음이 흔들렸다. 술에 취한 듯이. 비틀비틀 걷다가 닿은 정류소는 어젯밤에 내린 곳이었다.
내 생각에는 반대편 쪽이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것 같아서
"엄마, 우리 집에 가는 버스는 길 건너가서
타는 거 아니가?"
그제야 엄마는 주위를 휘 둘러보고는 길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 하고 한숨을 내뱉고도 한참을 앉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집으로 오는
버스를 탔다. 엄마는 자주 가볼 수 없는 이모를 생각하는지,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고 얼마 후에 작은 이모의 부음을 들었다.
엄마는 이모 장례식을 갔다 와서 사흘 동안 먹지도,
잠을 자지도 않았다.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했고,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는 건 엄마 주위를 적시는
흥건한 땀이었다. 언니들과 나는 수건으로 엄마 얼굴과 몸을 닦았고, 발을 주물렀다. 가끔 신음처럼
먼저 간 언니들과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와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사실 엄마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읬고, 큰언니의 장례도 못 가봤으며, 동생은 6.25 전쟁 중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소식과 약방이 불탄 충격으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가볼 수 없는 서러움이 있었다. 엄마도 쉰을 앞둔 데다 부모와 동기간의 영원한 이별에도 드러내놓고 슬퍼하지 못한 억눌림을 엄마 식으로 풀었다.
삶은 잔인했다. 그 상황에도 장사는 해야 했고,
딸들의 책가방은 아가리를 벌렸다. 그때 엄마는
"그놈의 돈, 종이로 그려도 다 못 그리겠다."
고 어록을 남겼지만, 엄마는 서너 번 굿을 했다.
향냄새도 싫었고, 신작로에 들어서면 들리던 특유의 소리도 싫었다. 우리 집뿐 아니라 잊을 만
하면 동네 곳곳에서 들리던 북소리는 그때의 여인들이 지난한 삶을 거쳐가는 씻김굿이었다. 엄마의 굿을 오빠는 질색했지만, 어쩌면 오빠에 대한 미안함을 잊는 황홀경은 아니었을까.
♧ 아버지는, 아버지는
아버지는 미처 부르지 못한 이름이다.
오빠가 실질적 가장이 되고부터 더 존재감을 잃은 아버지는 그림을 자주 그렸다. 한 번도 우리에게
그림을 보여주지 않았지만, 밭에 가면 황급히 그림을 숨겼다.
엄마는 오빠가 가장이 된 후, 은근히 아버지를
무시했다. 그러나 딸들이 아버지에게 대들거나 버릇없이 구는 건 용납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우리의 어떤 행동에도 웃었지만, 점차 우리와 멀어졌다. 아버지는 자신만의 왕국이 있었는데, 피난민촌을 정책이주촌으로 옮기고 나서 집의
형태가 남은 곳에 움막을 만들었다. 낮에는 깻잎을
따는 엄마와 나의 곁에 있었지만, 저녁을 먹기 전까 지 그곳에 머물다 왔다. 우리는 누구도 그곳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우리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 생이 되면서 아버지는 한 공간에서도 그림자였다. 그때는 많은 이웃들도 그랬기에, 별다르게 생각하 지도 않았다.
나는 스물여섯이 되었다. 오빠도 두 언니도 결혼을 하고 각자의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의 관습으로는 여자 나이 스물여섯은 직장을 퇴직하는 때였지만, 나는 결혼 대책이 없었다. 5월, 어느 새벽이었다. 아버지는 자다가 꿈을 꾸는지 두 팔을 허공으로 내저으며 누군가가 급히 가자고 하는 것 을 완강하게 뿌리치고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안 가겠다고 소리를 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화장실에 가다 발견한 나는 아버지를 흔들어서 깨우고 물을 가져다 드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했는데, 이후로 힘이 빠지고 이전의 아버지가 아니었다.
11월이었다. 아버지가 혼자서 고향에 다녀왔다. 오빠가 처음으로 해외출장을 갔는데, 언제 오냐고 몇 번이고 물었다. 목요일에 오빠가 돌아오자, 안심한 듯 오빠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친손자를 꼭 껴안고는 볼도 부볐다. 다음 날인 금요일에 목욕을 하시고 손발톱을 깎고는 쓰레기통에 버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니가 올해 몇 살이고?"
하셨다. 내가 나이를 말하자
"시집이 좀 늦겠다. 기다리면 좋은 사람 만난다."
하셨는데, 한 번도 못 본 눈빛이었다.
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아침을 드시고 밭으로 가셨다. 매일 드는 자루에 자신의 연장을 모두
담고서. 그날은 토요일이라 저녁에 친구랑 약속이 있었는데, 왠지 약속을 다음날로 미루고 싶었다. 친구도 마침 급한 일이 생겼다고, 다음 주에 꼭 만나자는 말을 하며. 외출복을 갈아입었다.
그때였다. 이웃집 새댁이 급하게 뛰어와서
"할아버지가 우리 집 앞에 쓰러지셨어요."
라고 했다. 아버지는 늘 다니시는 밭 초입에서
실수하지 않으려고 침을 자루에 뱉은 채 누워 계셨다. 뒤이어 오빠가 뛰어왔다. 오빠가 아버지를 업고 집에 와서 편히 누이고 미지근한 물로 몸을 닦아드렸다. 조금 있다 정신이 드시는지, 우리를 쳐다보다 무슨 말인지 하려는데, 기침이 나서 말을 못 했다. 내가 휴지로 입을 닦아드리자, 안심한 듯 잠이 드셨다. 그 잠이 아버지가 지상에서 누린 최고의 잠이었기를.
11월 중순이었다. 집이 좁아서 신작로 귀퉁이에 친 천막엔 많은 사람이 오셨는데, 엄마도, 오빠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상부상조라는 말에 걸맞게 아버지의 지인으로 오신 분들은 다 자신의 형편에 맞게 쌀도, 국수도, 막걸리도 들고 오셨다. 길고 긴 소박한 줄은 생각지도 못한 줄이었고, 모두가 아버지를 칭송했다. 그림을 잘 그려서 한 장씩 나누어주기도 했다는 데, 정작 가족인 우리는 아버지의 그림을 갖질 못 했다. 아버지는 마음이 허해도, 자식들의 성취에도 앞으로 나서지 않고 자신의 움막에서 그림을 그리셨다.
우리 가족은, 특히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보내지 말아야 했다. 예순일곱 해의 가파른 언덕에는
일찍 여읜 부모에, 징용에, 책임져야 할 가족을 제대로 이끌지 못해 그림자처럼 지낸 시간이 어설프게 쌓여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나의 철없이 낙관적인 생각의 근원을 주셨고, 사물의 색채를 다르게 보는 감각을 주셨는데, 말이다.
엄마는 아버지의 움막 앞에서, 아버지와 나눠갖지 못한 삶의 무게를 '랩' 하듯 쏟아내었다. 후련한 듯 밭을 내려오던 엄마는 은유로 사시던 분이었는데,
시대를 잘못 만나 한 예술가의 작품 한 장 없이 아버지를 보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가 된 막내는 매일 그림 한 장을 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