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팀만! 어른들의 축제, 공천포 체육관

by 새라

탁구를 시작하기 전, 내가 알고 있던 스포츠 대회라고 해봤자 올림픽, 월드컵, 아시안게임 정도였다. 하지만 탁구의 세계에 들어오고 보니 제주도협회장배, 제주시협회장배, 서귀포시협회장배 등 지역대회가 다양했다. 심지어 기업이 후원하는 사설대회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한백김치배 탁구대회’ 다. '한백김치'는 제주도 토종 브랜드 김치 회사다.


한백김치배 대회요강이 탁구대회 사이트인 에어핑퐁에 올라왔다. 11월 마지막 이틀 동안 '서귀포 공천포 체육관'에서 개최된다. 제주시에서 서귀포시까지는 최소 1시간 이상 걸린다. 육지 사람에게는 같은 제주도에서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뭐가 다를까 싶지만, 제주시 사람들에게 서귀포는 심리적 거리가 서울에서 부산쯤 된다. 뭐! 서귀포? 굳이 서귀포까지? 도대체 몇 시에 출발해야 하는 거야? 참가해? 말아? 많은 사람이 고민했지만 나는 결정했다. 그래, 가자!


토요일은 단체전, 일요일은 개인전과 개인복식이 열린다. 단체전과 개인전은 다른 대회와 다를 바 없지만, 개인복식은 달랐다. 두 명이 한 팀인 개인복식은 상위부와 하위부로 나눠서 경기가 진행되는데 상위부는 두 선수 레벨(부수) 합이 6~10, 하위부는 11~18까지다. 나와 같은 초보(오름부) 9부가 파트너를 구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운 좋게도 대회 마감 하루 전날, 고수인 4부 회원과 부수합 13으로 한 팀이 되었다.


대회를 앞두고 복식 연습을 했다. 초보 그룹은 대회에 복식이 거의 없기에 두 명이 플레이하는 게 익숙지 않다. 고수 회원이 자신의 서브 손가락 사인을 알려줬다. 엄지손가락을 세우면 짧은 너클서브, 구부리면 짧은 커트서브, 빙그르르 돌리면 짧은 회전서브. 검지를 세우면 긴 너클서브, 구부리면 긴 커트서브, 돌리면 긴 회전서브. 구구단을 외우듯이 중얼중얼 외었다. 공을 못 치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서브 사인도 기억 못 하면 정말 바보처럼 보일 거 같았다. 초보끼리는 서로 사인을 맞춰도 공이 제멋대로 들어가기 일쑤다. 짧게 넣으려고 했는데 길게 들어가고, 회전을 주려고 했는데 일자로 쭉 가고. 그런데 고수들은 다르다. 서브를 시작으로 플레이가 연결되기에 서브도 정확하고 사인도 엄격하게 지킨다. 연습도 실전처럼 긴장됐다. “너무 부담 갖지 마세요. 우승할 거 아니잖아요. 즐겁고 재미있게 치면 되죠.” “제가 잘 움직이지를 못해서요. 진로 방해할까 봐 걱정돼요” “괜찮습니다. 제가 잘 피하면서 칠게요. 제가 서브 넣으면 돌아오는 공을 보면서 치면 됩니다.” 고수님의 친절한 멘트 덕에 잠시 마음이 놓였다. 잠시였다.


연습이 시작됐다. 파트너가 먼저 서브했고, 상대 팀과 서브권이 바뀌면서 내 차례가 되었다. 조심스레 서브를 넣고 바르게 서서 공을 바라보았다. 공이 내게로 빠르게 오고 있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파트너가 나를 뚫지 못했다. 한 점을 내줬다. “회원님! 그래도 서브 넣고는 뒤쪽으로 빠져주셔야 제가 공을 받겠는데요” "아! 죄송합니다. 움직일게요". 편하게 치라고 하는데 몸은 더 굳어갔다. 상대 라켓을 뚫어지라 쳐다봤는데도 막상 공이 오면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제가 공을 치면 빨리 탁구대 가운데로 들어와서, 다음 공 칠 준비하셔야 해요" 파트너의 가르침은 쉼 없이 계속됐고, 내 대답은 매번 똑같았다. "네, 알겠습니다." 머리를 긁적일 시간도 없었다. 긴장 속에 몇 번의 게임이 진행됐고, 패턴이 반복되자 플레이가 조금 익숙해졌다. 살짝 긴장이 풀리자 경기가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대회가 며칠 더 남았어도 좋을 거 같았다. 몇 시간의 연습으로 호흡을 맞추는 건 무리였지만, 약속된 몇 가지 사인과 파트너의 활기찬 기운 덕에 대회가 살짝 기다려졌다.


대진표가 나왔다. 무려 102팀이다. 우리 조는 4개 팀이었고, 조 3위까지 본선 토너먼트에 진출한다. 문제는, 초보(오름부) 9부가 있는 팀은 우리 팀뿐이라는 거다. 게임에서는 고수와 초보 조합보다 탄탄한 중간 레벨 조합이 유리하다. 파트너 간 실력 차가 크면 한 명은 부족한 플레이를 하고, 다른 한 명은 무리한 플레이를 하기 십상이다. 우리 팀의 목표는 조 3위. 딱 한 팀만 이겨보기로 했다.


대회 날, 손가락 사인을 되뇌며 대기석으로 향했다. 그런데 강력 우승 후보 한 팀이 기권이었다. 남은 셋 팀이 모두 본선 진출이다. 목표 자동 달성이다. 예선 경기가 진행됐고, 우리는 기대대로 두 팀 중 딱 한 팀을 이겼다. 조 2위로 본선에 올랐다. 본선은 시작부터 달랐다. 구구단만으로 본선의 문턱을 넘을 수는 없었다. 상대 팀 고수의 서브를 날렸고, 수비도 하지 못했고, 내 공은 탁구대 밖으로 날아다녔다. "서브도 못 받았어요…." "아니에요, 상대가 잘한 거예요. 우리 잘했어요!" 파트너가 손바닥을 힘차게 내밀었다. 웃고 있는 그의 표정을 보니 정말로 잘한 거 같았다. 졌지만 점수 차는 크지 않았다. 이 정도면 잘 버텼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큼 다가가 손바닥을 마주쳤다. "네, 맞아요. 우리 잘했어요."


경기가 끝나니 허기가 몰려왔다. 동호회에서 준비해 간 간식도 많았지만, 체육관 한편에 '맹여사네 포차' 가 준비돼 있었다. 대회 후원인인 '맹여사'가 준비한 붕어빵과 어묵 포차다. 동호회별로 미리 나눠준 쿠폰을 붕어빵 사장님께 건네면 뜨끈한 어묵 국물에 돌돌 말린 어묵과 바싹 구워진 붕어빵을 먹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슈크림 붕어빵도 있다. 한쪽에서는 ‘한백김치’에서 준비한 무한 사발면과 무한 김치가 뜨거운 물과 함께 놓여있다. 신라면, 튀김우동, 진라면, 육개장, 새우탕 등 사발면 종류도 다양해서 대회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먹는다면 10개도 더 먹을 수 있다. 김치도 겉절이, 총각김치, 신(辛)나는 김치, 맛김치 등 다양했다. 풍성한 먹거리만큼, 대회 경품도 상당했다. 320여 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두 명 중 한 명이 받을 수 있는 엄청난 수량이다. 경품 당첨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었다. '한백김치세트(포기김치+총각김치)'.


오름부 단체전 3위, 오름부 개인전 16강, 개인복식 본선 진출. 경기의 아쉬움은 붕어빵 꼬리의 바삭함과 어묵꼬치의 달콤함에 이미 체육관에서 사라졌다. ‘서귀포 공천포 체육관’은 온종일 축제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작은 공에 집중하는 사람들, 그들을 한마음으로 응원하는 사람들, 사발면과 김밥을 먹는 사람들, 붕어빵을 들고 어묵 국물을 홀짝이는 사람들. 아침 일찍 제주시에서 달려간 그곳은 정말로 어른들 축제의 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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